초정리 편지 창비아동문고 229
배유안 지음, 홍선주 그림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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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왕조'였다. 
근대적 '국가'의 개념과 '왕조'를 동일시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국가'는 사회적 계약체이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반면, '왕조'는 대물림되는 자리에 따른 왕권신수의 결과로 모든 권력은 왕에게 있다. 

그래서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국민이 나서서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왕조'에 위기가 닥치면 '왕족'이 나서서 지켜야 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조선 말, 순헌철 3대 60년간의 폭정으로 온갖 정치가 문란해지자 동학 농민군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 동학 농민군을 말살하기 위해 '이씨 왕조'는 일본의 '외인부대' 천여명을 동원하여 신식 소총으로 수만 명의 농민군을 우금치 전투에서 말살하고 만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세종의 '한글 창제'는 곱게 보이지 않는다.
훈민정음 서문에서 '어리석은 백성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아서,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라고 한 정치적 수사를 곧이곧대로 믿고, 세종은 성군이다. <세종 대왕>이다. 이렇게 믿는 것은 참 순진한 말씀이다. 

전두환 각하께서 '정의 사회 구현'을 외치신 <민주 정의당> 대빵이었다는데, 과연 그랑 정의, 민주가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걸 믿는 것은 순진하든지, 멍청하든지... 그런 것이다.
문어 각하께서 정의, 민주, 를 부르짖은 이후에 하신 짓거리를 보면 알 수 있다. 모순되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함을. 

세종 실록을 보면, 세종 때, 합법적인 사형 집행이 가장 많았다고도 하고,
명 재상으로 소문난 황희 정승이 뇌물 수수 사건으로 조사받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한다.
세상에 난 소문은 모두 믿을 게 못 된다.
특히 정치가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더하고...
정말 훈민정음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글이라면, 그것으로 어떤 책을 지었어야 할까?
농사직설이나 농가월령가 같은 것들을 널리 펼쳤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훈민정음으로 처음 만든 책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오버액션으로  펼친 '용비어천가'다.
요즘에도 '아부의 문학'으로 꼽는 그 책. 음, 역시 조선 건국은 찜찜했던 모양이다.
제 아비와 할아비가 모두 연쇄살인범임을 그 자신 잘 알고 있었던 세종이었음에랴. 오죽하면 첫째, 둘째 형들이 세자자리 버리고 도망을 다 갔을까. 

그리고 훈민정음으로 열라 펼친 책들은 모두 <유교의 공고화>를 위한 책이었다. 한결같다.
<소학 언해> <삼강 행실도> 등은 훈민정음으로 엄청 찍어 돌렸다.
임금을 위해, 남편을 위해, 아비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고, 허벅다리를 자르고, 목을 매고' 완전 호러엽기쑈가 따로 없다. 그걸 국민에게 강요하듯 먹이기 위해 만든 글이다. 

물론 그 부작용으로 간편하게 문자 생활을 하고 있는 오늘날, 세종 임금에게 감사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당시 백성들이 '세종'을 '성군'으로 모셨을 거라는 생각은 오버액션일 수도 있을 것이다.
태조, 태종에 이은 세종 역시 '성계육'을 씹던 기분으로 씹어돌리기는 쉬웠을지언정, 세종의 정책을 쌍수들고 감사하는 시대가 아니었을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인데... 다들 세종 엄청 좋아한다 싶다. 

이 책은 훈민정음의 반포 목적을 정말 충실히 믿고 있다.
그래서 인자하신 성군 세종께서 반포하신 훈민정음으로 편리한 문자 생활을 하는 백성의 이야기는 행복하기까지 하다.
세종대왕께서는 돌깨는 석수의 꼬마 하나에까지 사랑 가득한 마음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는
글쎄,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뭔가 찜찜하게 이건 아니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하다. 

추석에 물폭탄이 쏟아졌다는 서울에서,
공무원이 늦게 출동했다는 뉴스는 나와도, 서울 시장이나 구청장이란 인간들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나오는 뉴스를 만나지 못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드는 건, 뭔가.
주소를 잘못찾아 전가하는 것이 늘상 권력이 일반 백성에게 펼치는 연막 전술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어쩌다 내 독서는 이런 쪽으로 돌아가는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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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9-2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만길<분단시대의 역사인식>에도 한글창제는 애민사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내용이 있지요.제가 본 가장 격한 세종비판은 박노자 것입니다.세종비판자 중 글샘 님의 기억에 남는 것은 누가 쓴 것이었는지요?

글샘 2010-09-26 23:20   좋아요 0 | URL
뭐, 세종비판자가 몇 되지도 않지만, 누가 쓴 건지는 별로 모르겠구요. 조선이란 왕조가 워낙 저런 성향의 국가였으니, 문제의식을 가져 본 겁니다.

2010-09-25 2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6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