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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거울 ㅣ 창비시선 127
이가림 지음 / 창비 / 1995년 2월
평점 :
나를 보는 나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
무한한 반사의
환한 허공 속으로
뚫린 길
없는 나를 찾아
그림자 하나
홀로 헤매고 있다 (순간의 거울 3, 전문)
이가림, 1943년생치곤, 이름 참 예쁘다. 아니, 잘 생겼다.
순간의 거울이란 시집 제목을 보고는, 이런 상상을 했다.
엘리베이터 양면에 붙은 거울들이 반사하고 반사하는 모습 속의 나,
또는 제주도 거울의 집 안에 비친 삼각형 거울들에 비치는 나의 옆모습 뒷모습들...
'없는 나'를 그 '숱한 나들'로부터 찾아내는 눈이 신선하다.
나는 지하철을 사랑한다 /2만5천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인천행 지하철에 흔들릴 때마다
2만5천 볼트의 사랑과 /2만5천 볼트의 고독이 /언제나 내 안에 안개처럼 /넘실거리기 때문이다
징그러운 발을 감추고 /안 보이는 한쌍의 촉각을 세운 채 /음습한 곳에 묻혀 사는 벌레들을
마구 잡아먹는 /한 마리 길다란 지네
그 꿈틀거리는 몸뚱어리 마디마디 /환히 불 밝힌 방 안에서 /학생 공원 선생 군인 회사원
창녀 수녀 신문팔이 소매치기 /이 땅의 눈물겨운 살붙이들 모두가 /서로 뺨을 맞대고
서로 어깨를 비벼대고 /서로 밀치고 /서로 부추기고 /서로 껴안으며 /즐거운 지옥의 밧줄에 묶여 끌려간다
이리 부딪치고 저리 쓰러지는 /그 장삼이사의 물결 속에 /몸을 던져 /나 또한 즐거이 자맥질한다
너의 살결에 /나의 살결이 닿고 /너의 숨결에 /나의 숨결이 섞이는 /황홀한 세상
거대한 군중의 파도가 /물거품의 자취조차 없이 /나의 파도를 삼킨다.
나는 지하철을 사랑한다 /2만5천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인천행 지하철에 흔들릴 때마다
2만5천 볼트의 사랑과 /2만5천 볼트의 고독이 /언제나 내 안에 안개처럼 /넘실거리기 때문이다 (2만5천 볼트의 사랑, 전문)
그의 눈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따뜻한 눈으로 지하철 안의 사람들을 응시하노라면, 모두가 뺨을 맞대고 즐겁게 지옥으로 간다.
지하철과 지옥과 지네의 혼성 화음 속에서 시인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민중과 지하철을 그는 사랑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 미안하다는 듯이 쪼그라진 늙은 짐승 한 마리가 길 모퉁이 응달 아래 주저앉아 굴을 까고 있다. 차갑게 소리내어 떨고 있는 카바이트 불을 향해 갈 곳 없는 성긴 눈송이들 몇 점 날파리떼인 양 날아와 치지직 타 죽는다. 새빨간 혈관의 네온사인이 도시의 피를 빨아들이는 밤이 깊어가도 주름살 깊게 파인 짐승은 곰팡이 핀 동굴로 쉬이 돌아갈 줄 모른다. 그의 그림자가 무지개빛 아롱진 개울까지 길게 뻗어 수륙 양서의 괴물처럼 웅크린 채 꿈꾸듯 꿈틀거린다. 아아, 아무도 보지 못했으리라. 카바이드 불 꺼진 길모퉁이에서 굴 까는 손이 시커먼 밤의 아가리에 물려 아귀아귀 뜯어먹히고 있음을 ! 구겨진 부대자루 하나가 쓰러지듯 그렇게 그는 쓰러졌다. (길 모퉁이의 생, 전문)
하나님이나 되듯/ 양철 함지박을 이고 다니며/ 못생긴 꼴뚜기, 갈치 따위를 팔다가//
발바닥에 물집 생겨/ 물집 터져/ 쓰라림도 그 무엇도 아닐 때까지/ 팍팍한 하룻길 돌고 돌아/ 솔, 좀약, 양말, 고무줄, 수세미 따위/ 알록알록 잡동사니 팔다가 팔다가//
언제나 자정 넘어 돌아오는/ 그 몸뻬 입은 여자의 / 삐걱 소리 삐걱 소리 손수레의 삐걱 소리//
한마리 더러운 하마같은/ 그 여자가/ 돈을 속곳 깊숙이 감추어둔 그 여자가/ 오늘 마침내 시립병원에서/ 쓰러졌다고 한다/ 온르 마침내 장사를/ 마감해버렸다고 한다//
멀고 먼 어둠 저쪽에서/ 들려오는/ 삐걱 소리 삐걱 소리 손수레의 삐걱 소리 (귀가, 전문)
죽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다 육신을 벗는 부처들의 모습을 그는 놓치지 않고 그린다.
며칠 전 인터넷을 울렸던 어느 용광로에서 산화해간 청년에게 부치는 글이라도 그는 썼을 것이다.
광온(狂溫)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인터넷 alfalfdlfkl)
세상엔 언제나 낮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 낮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낮춰보는 일은 너무도 흔하다.
하는 일이 <낮아보이는 일>이고, 보수가 <낮은 일>일 뿐이지.
그 사람이 <낮은 사람>인 것은 아닌데... 그 사람을 <낮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더러운 세상이다.
벽을 보고 욕이라도 하듯, 시에서라도 마음을 달구어야 하는 것이다.
아아, 헛되고 헛되도다
새 한 마리 떨어뜨리지 못하는
미친 시인의
사격술이여 (헛수고, 부분)
언어는 늘 핵심을 어느 정도 벗어난 곳에 가서 날아가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시인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 언저리를 벅벅 긁어봐도, 격화소양, 신발 신고 긁는 듯 시원하지 않으니, 미친 시인의 사격술은 무기력하다.
하나뿐인 제 몸을 내던져
살갗과 살갗 서로 부비는
저 빛 머금은 눈물 같은
목숨들의 발걸음! (하나가 되기 위한 빗방울들의 운동, 부분)
90년대의 시집에는 그래도 이런 연대감을 드러낸 시들이 많았다. 21세기와 함께 열에 녹아버린 한 점 눈처럼 사라져버린 그런 연대감이...
그대가 밤마다
이곳 문전까지 왔다가 가는
그 엷은 발자국 소리를
내 어찌 모를 수 있으리
술 취하여
그대 무릎 베개 삼아
잠들고 싶은 날
꿈길 어디메쯤
마주칠 수도 있으련만
너무 눈부신 달빛 만리에 내려 쌓여
눈먼 그리움
저 혼자서 떠돌다가
돌아올뿐
그동안
돌길은 반쯤이나 모래가 되고
또 작은 모래가 되어
흔적조차 사라져
이젠 내 간절한 목마름
땅에 묻고
다시 목마름에 싹 돋아
꽃 필 날 기다려야 하리.(목마름, 옥봉 이씨에게 보내는 편지)
近來安否問如何 (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 (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 (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 (문전석로반성사) (몽혼, 이옥봉)
요사이 어떠신지 안부를 전합니다. 달이 창가에 이르면 제 한이 많습니다.
만약 꿈속 혼이 다닌 자취 남긴다면, 문 앞 돌길은 반이나마 모래가 되었을 것을...
옥봉의 한시, 몽혼을 읽고 쓴 시 목마름도 아름답다.
시인의 예민한 마음의 촉수를 적시는 세상의 기체들은 달콤한 것들만은 아니다.
시큼한 땀 냄새도 잡히고,
물큰한 비린내도 잡힌다.
알싸한 눈물 냄새도 잡히고,
처절한 피 냄새도 잡힌다.
이가림은, 가리지 않고 촉수에 닿는 냄새들을 잡아 시로 옮기는 힘을 가진 시인이다.
권위주의와 상업주의를 싫어하여 과작의 시인임이 좀 아쉽지만, 이가림의 시들의 힘은 독자의 마음에도 굳게 전해지기도 해서 읽는 이를 고양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