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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에 서쪽을 빛내다 ㅣ 창비시선 3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평점 :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제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殘像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장석남,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장석남, 하면 이 작품이 생각난다.
아, 아름다운 말소리다. 왼쪽 가슴 아래께...
그 통증 또한 아름답다. 그래서 이 시집도 빌려 두었다.
묵을 먹다가, 젓가락 끝에서 미끈덩 놓치거나, 묵이 슬쩍 갈라져 버려서 간장 종지에 퐁당 빠뜨린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걸로 이런 시를 쓴다.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고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고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묵집에서, 전문>

바위 곁에 석류나무 심었더니
바위 그늘 나와서는 우두커니
석류꽃 기다리네
장마 지나 마당 골지고
목젖 붉은 석류꽃 피어나니
바위는 웃어
천년이나 만년이나 감춰둔 웃음 웃어
내외하며 서로를 웃어
수수만년이나 아낀
웃음을 웃어
그러니까
세상에 웃음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울음도 생겨나기 이미 전부터
둘의 만남이 있었던 듯이
우리 만남도 있었던 듯이 < 바위그늘 나와서 석류꽃 기다리듯, 전문>
석류꽃을 본 사람은 그 소담한 자태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능소화처럼 청승맞지 않으면서도 탄탄하게 붙매인 주황빛 꽃은
장래 다가설 열매의 농염함에 지레 부끄러워라도 하듯 새초롬히 고개를 숙이고 핀다.
그 석류꽃 피어나는 마당에서 바위는 웃음을 웃는구나.
꽃도 바위도 품위있어 멋지다.
시집의 뒤페이지에 김민정 시인이 나즈막히 읊조린 말들은 그 앞의 열렬한 시평보다 다정하다.
진정으로 시인의 시를 감싸안으며 읽은 독자의 가슴이 오롯이 드러난다.
묵의 맛과 그의 붉은 뺨과 바위, 그리고 돌계단의 층계...
낙산사 새벽종 치는 일과 요를 펴는 시인의 손길까지...
시집을 읽고 마음에 그려진 도화지 한 장을 살포시 펼친다. 이런 글을 만나면 마음이 황홀해 진다.
홀과 황은, 희와 미 사이에서 온다. 아련하게 비치지만 정확히는 보이지 않는 황홀과 희미의 실루엣.
이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자가 너무 많다
이 문으로 들어설 수 없는 자가 너무 많다
이 문으로 들어오고 싶지 않은 자가 너무 많다 < 대문, 부분 >
술에 취해 들어온 그에게 대문은 갑자기 이물감을 느끼게 하며 덤벼든다.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꽃같고, 연날리기같던 삶이 추레한 늙음과 오버랩되는 순간...
나는 이 문으로 들어선 것일까?
들어서고 싶기나 한 것일까?
대문을 바라보면서 무추름한 눈길을 던지는 마흔 넘은 사내의 마음이 축축하게 젖어, 함께 서러워진다.
똥이 튀어 변기를 닦았다...
엿새째 이어지는 설사를 나는
논어를 공부하듯
복음서를 공부하듯 엄숙히
내면에 들여본다
속곳에 지린 것도 몰래 헹구어 내놓고는
윤리를 생각한다
이슬비는 새벽 내내 처마 끝에 모여들어 한방울식 떨어진다 <변기를 닦다, 부분>
도를 닦는 일은, 사는 일이고,
사는 속에서 구질구질 떨어지는 설사 하나에서도 놓치지 않고 얻는 것이 있고 보는 것이 있는 시인.
그 마음 속을 시로나마 만나는 일은 반갑고 황감하다.
시 속에 들어가 묵을 먹고,
시 속에 들어가 생활을 만나고...
장석남의 뺨에 손을 넣어, 그 사람을 만지노라면,
서쪽 창에서 비치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햇살 속에서 시들어가는 사십대의 얼굴에서,
반짝,
빛나는 순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볼은 어린 아이의 그것이지만,
뺨은 나이든 이의 고집스런 부분이다.
그 뺨으로 손을 넣고,
뺨에 비친 빛살의 오후를 빨랫줄에 너는 시인을 들여다보는 나는
시를 통해 고집을 잊고, 잠시나마 나를 잊고,
반짝,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