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쉰세 번째 생일 날 이제까지 읽은 책 중 12권을
한 달에 한 권씩 읽어가며 독서일기를 쓴다.
2002년 6월에서 2003년 5월까지.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 일기는 한 달에 한 권을 읽고 쓴 리뷰인 만큼,
폭이 넓고, 링크가 대단하다.
하이퍼 링크 독서의 표본이 되는 책이다.

샤토브리앙, 무덤 저편의 회고록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 하나. 기억이라는 특징은 어리석음과 관련될 때가 많다.
그건 우둔한 영혼의 짐이고, 묵직하게 누르는 짐 보따리로 우둔한 영혼은 더 우둔해진다.
그러나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우정도, 사랑도, 즐거움도, 일도 모두 잊어버릴 것이다.
천재들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제아무리 사랑으로 가득한 가슴이라도 기억을 못한다면
다정함을 잃은 것이다.
우리라는 존재는 그저 끝없이 흘러가는 현재의 연속적인 순간으로만 남을 것이다.
과거는 없을 것이다
.(94)

타인, 에 대한 브라우닝의 정의
짐승도 그렇게 싫어했던 적은 없다.
그는 그런 고통을 받아 마땅할 만큼 사악할 게 틀림없다.(86)
 

아, 타인.
금강경에서 다룬 아상과 인상이 이런 것이다. 
자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사랑했던 적이 없고, 그는 어떤 고통도 받지 않아야 마땅할 만큼 상냥할 게 틀림없다>고 보지 않겠는가? 타인에 대해서는 악마임에 틀림없다고 볼 것이고.
두려운 시선으로 날카롭게 바라본 타인.

이중현실은 자신을 지운다.(31)
모렐의 발명 

'도플갱어로서의 서재'를 쓰고 싶어하는 망구엘. 그와 보르헤스의 이야기는 참으로 우연한 신비다.
나 아닌 또 다른 나로서의 <서재>
이런 이중 현실은 자기 자신의 빛깔과 냄새를 점점 퇴색하게 한다.
그러다가 자신을 지워가게 되는 걸까? 시니컬과 냉철함이 담겼다. 이 한 마디에...

괴테, 친화력
샤로테
어떤 일들은... 운명의 지배를 받고, 운명은 아주 고집스럽다.
이성과 미덕, 의무와 모든 신성한 것이 그것을 거스르려 해봐도 부질없는 일이다.
상황은 우리가 아닌 운명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방식으로 일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건 운명은 제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사실 운명은 우리 자신의 소망과 의도를 이루려 하는데, 그걸 우리가 생각이 모자라서, 거역했던 게 아닌가? 

운명을 탓할 게 아니다.
운명은 소망과 의도를 이루려 달려오고 있는데, 그걸 걷어찬 건, 나?
유쾌한 반성이다. ^^


오이디푸스 역을 맡은 로렌스 올리비에의 연기 비결을 물었더니,
담비를 사냥하는 법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요.
북극에서는 소금을 뿌려놓으면, 담비가 와서 그걸 핥아먹는다더군요.
그러면 혀가 얼어 얼음에 찰싹 달라붙는대요.
오이디푸스에서 울부짖을 때 그걸 생각했습니다.
완벽하게 포착해낸 진실의 순간.
이런 비유들은 효과적이고 재미있다. 이런 유사함에 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비유가 유사성에 기초한 것인데,
이런 신기에 가까운 유사성을 만나는 일은, 이야기가 죽지 않는 이유가 된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케네스 그레이엄

나이가 들수록 변화가 일어나는 속도는 빨라진다.
친구들이 사라지고, 풍경이 어질러진다.
친구들이 늘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우주에서 믿을 수 있는 고정불면의 어떤 지점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끊임없이 목소리를, 얼굴을, 이름을 잃고서 그리워하고 싶지 않다.
눈가리개를 하고도 너끈히 돌아다니고 싶다.
말머리나 서론 같은 것 없이 대화를 시작하고 싶다.

필로우북, 세이 쇼나곤

즐거운 일들이란, 아직 읽지 않은 많은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
또는 상권을 재미있게 읽은 책의 하권을 손에 넣는 것.
하지만 실망스러울 때도 많다.
마르게리트의 독서론 :
우리의 진정한 출생지는 우리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지적인 시선을 던지는 곳이다.
나의 첫 번째 고국은 내 책들이었다. 

오늘 아침에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바라보다가 그 책들은 내 존재를 전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펼쳐서 페이지를 넘기기 때문에 살아나면서도 내가 자신들의 독자라는 걸 모른다. 

독서에 대하여... 잠자리에서도 메모할 정도로 사랑스런 글들에 대하여...
생각할 거리를 툭툭 던져주는 50대의 원숙한 리뷰가 여기 모여있다.
나도 50대가 되면, 이런 리뷰를 한 달에 한 편 쓸 수 있게 될까?
아니 그때까지, 망구엘을 기억이라도 하고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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