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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직선 ㅣ 창비시선 177
도종환 지음 / 창비 / 1998년 7월
평점 :
도종환, 이라고 하면, 1980년대 신파조의 영화 '접시꽃 당신'으로 신드롬을 일으켰던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 당시 아내와의 사별을 마음아파한 시가 슬픈 시대를 대변하듯,
울고 싶을 때 뺨 때려 준 역할을 하였던 셈인데, 접시꽃 당신의 뒷부분에도 시대비판적인 시들이 있었더랬다.
그러다, 1989년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일어선 교사들을 1500여명이나 해직을 시킨 피바람이 불었고,
그는 전교조 충북 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활동은 활동이지만, 비합법 노조의 활동이란 것이 출구가 보이지 않는 추운 겨울과도 같은 것이어서,
노조에서 생계보조비를 받고는 있지만, 어떻게 결말이 날지 아득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그의 절망의 어둠은 깊었을 것이지만, 어두울수록 필요한 것이 등불이고,
절망이 깊을수록 있어야 하는 것이 희망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가장 어두운 이 시기에 쓴 이 시집엔 희망도, 등불도 반짝인다. 환하지는 않지만...
매일 만난다 해도 다 못 만나는 그대를
생에 오직 한번만 만나도 다 만나는 그대를(희망, 부분)
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
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
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
넘치면 나를 태우고
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
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등잔, 부분)
그는 세상이 결코 모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세상은 부드러운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선들이 굽어서는 집을 이룰 수 없다.
부드럽지만, 꼿꼿한 것들만에 오래오래 집을 떠받칠 수 있다.
그는 부드러운 직선을 말하였지만,
그는 다시 딸각발이의 꼿꼿한 결기를 이야기한 것이다.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부드러운 직선, 전문)
언제부터인가... 변해버린 세상과 변해버린 사람들...
그리고 지쳐가는 자신을 보는 일은 팍팍하고 힘겹다. 지친 발걸음의 무거움이 귀가, 에서 느껴진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스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내일도 우리는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귀가, 부분)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취한 눈으로 흥청망청 다리도 허천허천 풀려서,
월드컵도 보고, 맥주도 한 잔 마시면 좋으련만,
자기의 길들여지지 않는 꼿꼿한 마음이 스스로 불편하고 힘겨울 때도 있는 법.
마치 늑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늑대의 시간을 본다.
개와 늑대의 시간.
너는 왜 길들여지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아직 산골짝 바위틈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불타는 눈빛을 버리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아직도 그 눈빛 버리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바람을 피하지 않는 것일까
왜 바람 부는 들판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오늘은 사람들 사이에서 늑대를 본다
그 무엇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외로운 정신들을(늑대, 부분)
그러나 그가 바라본 세상은 자연처럼 순리가 돌아올 것을 그는 바라본다.
그래서 바삭, 바스라질 듯한 마음에 조금씩 물을 준다.
그의 관조에서 힘을 얻는 것이 또한 희망이다.
하늬바람에 모과나뭇잎이 올라오는 걸 보니
이파리 하나 내는 데도 순서가 있다.…
양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잎 하나를 꼭 세워둔다
좌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꼭 그렇게 잎을 낸다…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들꽃도
저희끼린 다 정교한 질서를 다르고
생명의 사소한 일 하나를 끌어가는 데도
반드시 지킬 줄 아는 차례가 있다
이파리 하나에도(잎차례)
세상의 사소한 것 하나도 허투루 지나치는 것은 없다. 모두 섭리에 의함이다.
거기 진리가 있다면, 독재 시대는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 본다.
그러나... 그 믿음은 확실하지 않기에... 억지로 믿자고 스스로를 포섭한다.
나뭇 가지의 새 순은 다시 솟는 것임을 그리하여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도 서로에게 확실한 내일에 대해
말해줄 수 없는 시대
돌아보면 너무도 많은 이가
벌판이 되어 쓰러져 있는 저녁…
잡목덤불 헤쳐 새 길을 내야 하는 이 늦은 시각에
다시 등을 기대고 바라보는 나무의 빈 가지
그러나 새 순 새 가지는 잎 진 자리에서
다시 솟는 것임을 믿을 수밖에 없는(빈 가지, 부분)
맨 앞에서 싸우지는 못하지만, 맨 나중까지 서포터가 되어 주겠다는 노 선생님의 말이 그는 기꺼워 못 견딘다.
연세드신 선생님이, 그가 옳다는 것을 믿어주는 동료 교사가 있기에 그는 굳이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맨 앞에 서진 못하였지만
맨 나중까지 남을 수는 있어요
남보다 뛰어난 논리를 갖추지도 못했고
몇마디 말로 대중을 휘어잡는 능력 또한 없지만
한번 먹은 마음만은 버리지 않아요
함께 가는 길 뒷자리에 소리없이 섞여 있지만
옳다고 선택한 길이면 끝까지 가려 해요
꽃 지던 그 봄에 이 길에 발디뎌
그 꽃 다시 살려내고 데려가던 바람이
어느새 앞머리 하얗게 표백해버렸는데
앞에 서서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이들이
참을성 없이 말을 갈아타고
옷 바꿔 입는 것 여러번 보았지요
따라갈 수 없는 가장 가파른 목소리
내는 사람들 이젠 믿지 않아요
아직도 맨 앞에 설 수 있는 사람 못된다는 걸
잘 알지만 이 세월 속에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한가지예요
맨 나중까지 남을 수 있다는... (뒷자리 - 노 선생님, 전문)
그래서 혼자가 아닌 그는, 그의 가장 뛰어난 시 중 하나인 <담쟁이>를 짓게 되는 힘을 얻는 것이다.
저것은 벽
어쩔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한톨 살아 남을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 이라고 말할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 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벽을 넘는다.(담쟁이,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