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웃음판 - 한시로 읽는 사계절의 시정
정민 지음, 김점선 그림 / 사계절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때에는 고금이 있어도 정서에는 지금과 옛날 사이에 아무런 간격이 없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너무 잡다한 지식 중심이 되어버리고, 고금의 정서를 아우르는 공부에는 점점 관심이 없다.
고전 교육의 부실의 일단을 수능 제도가 만들어 내기도 했겠지만, 시험 중심의 교육이 고전을 팍팍하게 만든 것에도 책임이 있다. 

 

실버들을 천만사 늘어놓고
가는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외로움이 아무리 아쉽다기로
돌아서는 님이야 어이 잡으랴

한갖되이 실버들이 바람에 늙고
이내몸은 시름에 혼자 여위네

가을바람에 풀벌레 슬피울때에
외로운 밤에 그대도 잠못 이루리  

김소월의 이 시는 그대로 한 편의 한시다.
기승전결로 시의 품새를 잡은 것도 그렇고, 실버들 천만사에서 우러나는 정서도 그렇다.
한자는 한 글자가 하나의 의미를 담고있는 동사가 많다.
그래서 동음이의 글자를 이용해서 유희를 즐기기도 한다.
예를 들면 '복 福'자를 뒤집어 두고 복이 오기를 기원하는 것 같은...(뒤집는 것도 한자로 '도 倒'이고 오는 것도 '도 到'다)  

실버들이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는 도구가 된 것은, 버들 류 柳의 음이 머물 留의 음과 같아서이다.
버들을 전해주는 마음에는 '내 곁에 있어 주'하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다.
물 한 바가지에 버들잎 띄워주었단 이야기가, 의도를 잘 읽는다면 그래서 진한 프로포즈가 될 수도 있는 일. 

실버들이 '천만사'도 마찬가지다. 천만 가닥의 '실 사 絲'자를 '생각 사 思'자로 쌍관의를 활용한 것이다.
실버들이 천만 가닥 늘어진 모습은, 당신 생각이 가득한 내 마음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겉으로는 <자연물>을, 그 광경을 그려내면서, 속마음을 은근히 넌지시 드러내는 것이 동양 미학의 은근의 아름다움이다. 한시의 이런 선경후정의 아름다움은 일본의 하이쿠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바라보는 일 觀, 그것을 통해서 자연의 이치가 마음 연못에 비치게 되는 照, 이런 일을 관조라고 하였다. 



 
맑은 새벽 목욕을 겨우 마치고
거울 앞 힘에 겨워 몸 못 가누네.
천연스레 너무나 고운 그 모습
단장하지 않았을 제 더욱 어여뻐.- 최해崔瀣, 「풍하風荷」



淸晨纔罷浴(청신재파욕) 臨鏡力不持(임경역부지) 天然無限美(천연무한미) 摠在未粧時(총재미장시) 

소담스레 솟아오른 수련을 보고, 이런 마음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의 글을 읽는 일만으로도 헌감스런 일이다.
바람이 일자 흔들리는 연꽃. 그 비록 탁한 물에 뿌리를 드리웠지만, 그 꽃의 아름다움은 부처님의 세계다. 

송나라 주돈이는 「애련설(愛蓮說)」에서

   
  "나는 홀로 연꽃이 진흙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잔물결에 씻기어도 요염치 아니하며,
속은 비었고 겉은 곧으며, 덩굴 치지 않고 가지 치지 아니하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꼿꼿하고 깨끗이 심어져 있어 멀리서 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에서 함부로 할 수는 없음을 사랑한다."
 
   

고 연꽃 애호의 변을 이야기한 바 있다.
이 가운데 '향원익청(香遠益淸)'이란 말은 더욱 사랑을 받아 군자의 우정을 이야기할 때 많이 쓴다.
가까이 있을 땐 모르다가, 멀리 떨어지면 그 향기가 더욱 맑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
무심한 듯 따뜻한 그런 손길. 연꽃은 그런 꽃이다. 

함석헌의 '그런 사람을 지녔는가'가 떠오르는 그런 구절이다. 

이 책의 그림을 김점선이 그렸다. 좀 의아했다.  
어느 날 정민 부부가 김남선의 그림을 구경하러 가는데, 김점선이 길에 멀뚱하게 섰다.

그런데 왜 여기 서 계십니까?

아, 스파게티가 먹기 싫어서… 

아, 이런 사람이라고는... 동료들이 스파게티 먹으러 우루루 갔는데, 자기는 거기 가기가 싫어서 혼자 섰다는 거다.
정말, 자유인이랄까... 왕따의 원조랄까. 그런 그가 이 시집에 흔쾌히 그림을 넣었다.
역시 웃는 말들이 압권이다.
김점선 그림의 '번짐'이 한시의 '묵화'와 여백의 미를 아우른 멋이 있다. 좀 있는 듯이 쓰자면 그렇단 말이다. ^^

한시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을 제안받았을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연히 요즘도 오래 전의 시들을 읽으니까.
늦게 태어나는 자들의 행복은 더 읽을 게 많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시를 읽으면서 시각적인 상`상을 한다.
화가는 실제로 이것을 나타내서 누군가에게 전달한다.
이런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아주 편하고 행복하게 받아들여서 즐겁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민의 글들이 좋았으리라. 장삿속이 빤히 보이는 책쟁이가 계약서를 들이밀었다면, 아마 그는 후딱 일어서 도망갔으리라.
그러면서, 자연스럽다고... 좋아한다. 순수한 마음이 보인다. 

이번 6월 평가원 모의고사에 이성부의 <서해>가 나왔다.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당신이 있을 것 같은 서해에, 화자는 굳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상상한다. 당신이 있는 그곳을... 당신이 그리웁기에.
그곳 바다도 여느 바다와 같을 것이지만, 그렇지만, 화자의 마음에 그곳 바다는 자꾸 떠오른다.
그리고 나의 당신은 속속들이 알아서 만족할 그런 사람이 아니기에, 사랑이란 그런 것이기에,
화자는 굳이 가지 않으려 마음먹는다.
그렇지만, 늘... 화자가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갈 수 없는 마음 속에서나 파도치고 있다. 철썩, 처얼... 썩, 척, 쏴...아...... 아...........
화자가 굳이 가지 않는 것은 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아, 이렇게 서해를 그리면서, 거기 있을지도 모를 당신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일.
이런 일들은 인간이 참 잔망스런 존재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山僧貪月色[산승빈월색]      幷汲一甁中 [정급일병중]     
到寺方應覺 [도사방응각]      甁傾月亦空 [병경월역공]    

산에 사는 중이 달빛을 탐해
물 긷는 병에 달까지 길었네.
절에 가면 응당 알게 될거야
물 쏟으면 달도 없어지는 걸.

이규보, 영정중월 詠井中月  



동양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텅 비어 있는 것 속에 가득 참이 있고,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있는 것,
그것이 인생의 묘미임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것.
그러기 위해서 자연물을 끌어들이고, 자연물의 관찰을 끌어들이고, 그것으로 자기 마음을 눙쳐버리는 부끄러움.
어눌함. 

그래서 논어에서, 말은 어눌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라고 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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