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시선 125
나희덕 지음 / 창비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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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이면... 가만있자,
내가 서울서 있던 중학교를 접고, 부산으로 옮겼던 그 해이다.
사람들은 쉽게도, 서울이 살기 싫어냐고 쉽게도 물어 보곤 했지만,
그 전해에 이쁜 아들을 낳고 잘 살고 있다가, 갑자기 작은 처형의 기세로 충격을 받은 사건이 얽혀 있었더랬다.
그래서 김일성과 정상 회담을 앞두고 있었던 그 해가 내겐 유난히 잊혀지지 않는다.
그 뜨거웠던 여름엔, 정말 더웠는데, 월드컵도 제법 재미있었더랬다. 

그 해 나희덕은 또 이런 시집을 내고 있었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가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 하늘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귀뚜라미, 전문)

서른을 앞둔 서러운 나이에 그는 아직 그의 울음이 노래가 아니라고 했다.
도시의 콘크리트벽 사이에서 나직하게 보내는 타전 소리라고 했다.
앞으로 올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일지 그때는 차마 생각할 수도 없던 때였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졌다고 믿어버리는 시대에,
그 썰물 앞에 시인이 끝내 디디고 서야 할 개펄은 얼마나 넓은 것인가.
거기 우묵하게 발 담그고 있으면, 어느새 물결이,
새로운 물결이 밀려와 내 존재를 압도해올 그런 날이 혹은 있을까.
지난 몇년의 기다림과 안간힘이 정작 무엇을 향한 것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오직 그 막막함의 깊이만큼만 시에 근접해가고 있음을 알 뿐이다.
감탕속의 내 발등을 새삼 내려다본다.
그 발등에 대한 부끄러움과 안스러움을 모두어 두번째 시집을 묶는다.(후기에서) 

후기만큼 간결하게 제 시집을 올바로 평가한 비평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나희덕의 후기의 앞부분은 이렇게 시대 속에 발을 담근 제 모습을 제대로 읽는다. 

내게 있어서 시는, 얼마남지 않은 불씨를 응시하는 일과도 같았다.
깜박깜박 살아있던 불씨들이 마지막 목숨을 분지르며 사라지던 순간 순간들
그 명멸의 소리들을 이렇게나마 적어보았을 뿐이다.
거기에 귀기울이며 남아있는 것만이 그래도 불시를 지켜내는 일인 양 말이다.
다만 그로 인해 창백하고 싸늘했던 나의 시에 조금의 핏기와 온기가 깃들 수 있다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사람의 냄새를 지닐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사라짐으로써 내게 남겨진 존재들. 여기까지 온 것도 오로지 그들의 덕택이다.
삶의 깊이를 헤아리고 담아내는 일이란 결국 그것의 비참함과 쓸쓸함을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아니라는 걸
이제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비참함과 쓸쓸함이 또한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면,
느릿느릿,
그러나 쉬임없이 그리로 갈 것이다. 매순간 환절기와도 같을 세월 속으로(후기 뒷부분) 

아, 이렇게 후기를 적는 일은 처음인 듯 하다.  

그의 시에는 도시의 살기 고단함이 잘 묻어나는 도회풍의 시다.
그 도시에는 골목길이 죽어가고 있고, 지직거리는 텔레비전 앞의 가족들은 너무나도 피곤하다.
도시의 빛깔은 무채색으로 가득하고, 작고 짧은 인간들의 그림자는 외롭고 각기 겉돈다. 

끊임없이 무엇인가 세워지는 곳에 사는 일은,
폐허에 사는 일보다, 더 고통스럽다,
집에 갇혀 있던 흙들은 수십년 만에 풀려나와,
햇빛을 껴안아본다. 그러나 이내 무료한 표정으로
돌아가, 더 견고한 벽 속에 갇히기를 기다리며
푸석해진다, 휘어진 철근 사이, 콘크리트덩이들이
먹다 남은 살점처럼 걸려 있고, 반쯤 깨어져 나간
항아리가 하늘을 벌써 몇입 베어먹었다, 햇살은
찡그리며 그 칼날 위에 눕는다, 내일은 어느 집이
헐려나갈까, 내 몸이 나를 모르듯, 저 낡은 지붕들도
제 때를 모르고, 손바닥만한 텃밭을 일구던 늙은 손도
그 끝을 모르고, 다만, 내일이라는 믿음이 벽을 낳고,
새로운 지붕을 낳고, 흙은 다시 그 속에 갇혀
마음으로나 쑥갓 상추 따위를 기르겠지,
큰 희망이 작은 희망을 내쫓고, 높은 지붕이 낮은 지붕을 삼키며,
끊이없이, 그림자가 길어지는, 그곳에서 (신정 6-1 지구, 전문) 

그가 교편을 잡던 곳이 재개발지구였던 모양이다.
도회지란 곳이 삐까번쩍 아름답과 화려하게 보이지만, 그 속의 삶들은 시든 배춧잎만큼이나 처절하다.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도 가득차고
어미는 둥지 위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 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 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 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 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봐요
돌아 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못 위의 잠, 전문) 

이 넓어보이는 도시에서, 콘크리트 벽에 외롭게 붙박인 못 하나.
그 못 하나의 이미지가, 좁은 골목의 아버지의 변신이다. 초라하지만 견고하다.
볼품없지만, 단단한 삶의 옹이를 그는 읽어내는 눈을 가진 시인이다.  

아, 그의 아버지를 읽으면,
김수우의 엉겅퀴꽃 아버지가 떠오른다.
밤새워 소주를 마시고,
절망 속에 깨어난 아침, 진통제를 먹고도 쏟아져나오는 기침을 어쩔 수 없고,
고장난 타자기처럼 벌떡 일어나봤댓자, 오라는 곳도 없건만,
고흐의 신발처럼 헌 구두짝을 걸치고, 길은 나서는 아버지.
당신의 옹이에 나는 무거운 코트처럼 부담으로만 남는 이야기.
슬픈 도시의, 슬픈 사람들 이야기. 

절대 <사랑스럽지 않은 나의 도시> 이야기들...

밤새워 소주를 마셔도 당신은 젖지 않는다 이미 세상의 빗물에 취해버린 이마와 가
슴, 봉창을 닮았다 아니 밤새 헤아려 놓은 희망으로 얼룩진 새벽봉창이다

문지방엔 당신이 밟아 넘어뜨린 근심이 더께졌다 삼킨 울음은 뭉그러진 못대가리로
박혀 빛난다 벗은 영혼은 못쓰는 타자기처럼 뻑뻑하지만 글쇠 몇 개 언제나 굳건히
일어선다

그런 당신의 옹이에 나는 옷을 건다 무거운 코트를 제일 먼저 건다

진통제처럼 떠있는 새벽달을 먹고 당신은 기침을 쏟는다 기침마다 헐은 아침이 묻어
나온다 헌 구두짝에 담긴 하루를 신고 당신이 걷는 길은 손등에서 쇠빛 혈관으로 툭
툭 불거지는데

당신의 방 앞에서 매일 꽃피는 붉은 엉겅퀴(김수우, 엉겅퀴꽃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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