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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여우 ㅣ 창비시선 163
안도현 지음 / 창비 / 1997년 7월
평점 :
뭐, 이런 리뷰 제목을 달고 있냐?
오늘 파란여우 님 생일이라고 소문을 내셔서, 안도현 시집 읽은 김에 시 선물 하나 부친다.
안도현의 이런 시는, 흔치 않은 편인데, 백석의 모닥불을 지펴놓고 읽는 시맛이 난다.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나는 방에 누에고치처럼 동그랗게 갇혀서
희고 통통한 나의 세상 바깥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세상에도 눈이 이렇게 많이 오실 것인데
여우 한 마리가, 말로만 듣던 그 눈도 털도 빨간 여우 한 마리가
나를 홀리려고 눈발 속을 헤치고
네 발로 어슬렁어슬렁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 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 산길에는 마을로 내려갈 때를 놓친 산수유 열매가 어쩌면 붉어져 있기도 했을 터인데
뒤도 안 돌아보고 여우 한 마리가, 우리 집 마당에까지 와서
부르르 몸 흔들어 깃털에 쌓인 눈을 털며
이 집에 사람이 있나, 없나 기웃거릴 것이라 혼자 생각하고
메주 냄새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타구니 속에 두 손을 집어넣고 쪼글쪼글해진
그리하여 서늘하기도 한 불알을 한참을 주물러 보는 것인데
그러면 나도 모르게 불끈 무엇이 일어서는 듯한 생기와 함께
나는 혹시나 여우 한 마리가,
배가 고파서 마을로 타박타박 힘없이 걸어 내려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사람 소리 하나 안 나는 뒤꼍에서
두리번두리번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살피다가
일찍 군불 지펴 넣은 아랫방 아궁이 가에 잠시 쭈그리고 앉았다가
산 속에 두고 온 어린것들을 생각하고는
여우 한 마리가, 혹시라도 마른 시래기 걸린 소도 없는 외양간 뒷벽에
눈길을 주다가 코를 벌름거리며
그 코끝에는 김나는 이슬 몇 방울이 묻어 있기도 할 것인데
아 글쎄 그 여우 한 마리가,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야속해서
세상을 차듯 뒷발로 땅바닥을 더러 탁탁 쳐보기도 했을 터인데
먹을 것은 없고
눈은 지지리도 못난 삶의 머리끄덩이처럼 내리고
여우 한 마리가, 그 작은 눈을 글썽이며
그 눈 속에도 서러운 눈이 소문도 없이 내리리라 생각하고 나는
문득 몇 해 전이던가 얼음장 밑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진
동무 하나가 여우가 되어 나 보고 싶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방문을 확 열어제껴 보았던 것인데
눈 내려 쌓이는 소리 같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아, 여우는 사라지고-----
여우가 사라진 뒤에도 눈은 내리고 또 내리는데
그 여우 한 마리를 생각하며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내 겨드랑이에도 눈발이 내려앉는지 근질근질거리기도 하고
가슴도 한없이 짠해져서 도대체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그리운 여우, 전문)
시골 학교로 발령을 받은 그가, 쑥부쟁이와 구절초도 구별못하는 선생이었음을 반성하기도 하고,
이적지 몰랐던 애기똥풀에게 미안함을 피력하기도 하지만, 그는 촌 선생 노릇 마저 하지 못한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화암사, 내 사랑, 부분)
그의 시에서는 어딘가 절집 마를대로 마른 목어 두들기는 냄새가 매캐하게 난다.
그 아슬아슬한 곳에 내려앉는 이유가 뭐냐?/ 내가 이렇게 따지듯이 물으면
잠자리가 나에게 되묻는다./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나와 잠자리의 갈등)
세상을 흔들고 싶거든
자기 자신을 먼저 흔들줄 알아야 한다고(바람이 부는 까닭, 부분)
나는 지금도 한국의 수도 서울에 살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모든 나는 세상의 중심에 있으니까!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알고
퇴근때마다 내 품으로 안겨드는 딸아, 그리고 아들아
이 아비는 목욕탕에 갈 때마다 남의 등을 밀어주기 전에
먼저 내 배꼽에 낀 때를 없애는 일에 몰두하였단다(세상의 중심을 향하여, 부분)
서정주가 '안도현이, 거 시 잘 쓰데~' 했다는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들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겨울 강가에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