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미술사 - 위대한 유토피아의 꿈
이진숙 지음 / 민음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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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풍만한 러시아 미녀가 사파이어빛 눈동자를 뽐내고 있다. 쿠스토지예프의 '미녀'다.
이콘이란 러시아 미술에서 아이콘이 나왔다는 정도의 상식 외에는 '러시아 미술'이란 것이 과연 있었는지도 몰랐던 나로서는 이 책이 상당한 충격이었다. 내가 배웠던 시답잖은 세계사 안에 들어있지 않았던 나라, 러시아.
러시아 혁명의 미화로 가득하던 시대에 대학을 다닌 나는 소련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결국 러시아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었던지를 무심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90년대 초반, 나이트클럽이란 곳에 가면 러시아 미녀들이 백색 피부를 빛내며 엉덩이를 실룩거리던 모습을 본 것이 러시아에 대한 실존적 체험이었고, 소문으로는 러시아 피스톨도 거래된다는 이야기들도 들리곤 했지만... 사실 러시아는 혁명이 없어지고 나서는 관심 밖의 나라였다. 

요즘 들여다본 러시아 미술사는 마치 조선의 미술을 서양인들이 안 알아준다고 투덜대는 한국 학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의 삶에 관심도 없었으면서,
남들의 삶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왜 내 존재를 알아주지 않느냐는 투덜거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니콜라이 야로센코의 <그네에서>(209), <청강생>(211), <삶은 어디에나>(212) 이런 그림들을 보면 눈물이 난다.
청강생의 그 풋풋한 젊음에도 눈물이 나고, 그네에서 속삭이는 밀어를 떠올려도 눈물이 나고, 수용소로 가는 열차에서 밝게 웃으며 비둘기에게 모이를 던지는 어린 아이에게서 '인생은 아름다워'의 역설을 보는데도 눈물이 난다. 

바실리 페로프의 <트로이카>에서 힘겨운 러시아를 끌고가는 세 어린 아이의 모습도 눈물겹다.
이 책에 이렇게 눈물겨운 그림들만 있는 건 아닌데, 나는 이 그림들이 몹시 마음에 밟혔다.
삶은 어디에나... 힘겨운 사람들로 가득하고, 그 속의 자잘한 삶의 냄새로 그윽한 모양. 

블라디미르 마코프스키의 <가로수 길에서>도 가난하지만 따스한 인간들의 마음을 엿보게 하는 그림이다.(206) 

이 책에서 가장 알아들을 법한 대목이 <나의 사랑 비테프스크>다.
마르크 샤갈의 이야기이기 때문. 그는 러시아 태생이며 그림속 마을 비테프스크(배가 고픈지 자꾸 비프스테이크로 보임)는 러시아에서 독립한 벨로루시의 한 마을이란다. 샤갈의 그림들에 나오는 고즈넉하고 아담한 마을...
그리고 그림의 전반에 흩뿌려진 듯한 푸른 빛.
그의 환상적인 푸른 빛에 대하여는, 샤갈 하면 떠올리는 슬픔의 푸른색에는 343쪽과 같은 숨은 이야기가 있다.
환상적인 푸른 꽃, 바실료뇩. - 이 색은 샤갈이 떠돌이 생활 끝네 사랑하는 아내 벨라를 잃고 그린 투명한 푸른 색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우리의 구세주>(48)는 기적적으로도 성스러운 이의 이마에서 가슴 부분만 살아 남았다. 신비를 더한다.  



이반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이다. 러시아 귀족의 오만함, 그리고 아름다움이 화면에 가득하다.
대기마저도 러시아의 그것을 호흡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하다. 흐린 것이 오히려 더욱... 

<레닌은 살았었고, 살아 있고, 영원히 살 것이다>처럼, 레닌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는 뮤즈의 그림은 충격적이다.(424)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로 알려진 뮤스에게 영감을 주었던 존재, 레닌.
그의 죽음은 영감을 상실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같지만,
이 그림에서 죽은 레닌의 시신이 방부 처리되어 아직도 붉은 광장에 영구 보존되듯,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신랄한 자기 비판에 맞닥뜨리게 된다. 

프라우다(진실이라는 뜻, 소련의 당 기관지)가 보여주었던 끝없는 '거짓'들은 현대 미술에서도 비판에 마주한다.
마치 이 나라를 쪼개는 것이 '한나라'란 이름을 쓰는 파당이고,
정의를 가장 짓뭉갰던 세력이 '민주정의'란 이름을 썼던 깡패당이었던 것과 같다. 

눈을 돌리면 어디나 사람의 냄새는 가득하다.
그렇지만, 눈을 감으면, 거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
부지런히 눈을 뜨고 눈길을 보내야, 거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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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쪽.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이렇게 써야할 곳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으로 쓰고 있다. 사소한 잘못이지만 고쳐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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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경험...
위의 쿠스토지예프의 <미녀> 이미지를 혹시 얻을까 하여 '다음'에서 '미녀'를 검색하고 '이미지'를 눌렀더니... 온갖 '므흣'한 여인들의 비키니 옷차림을 만날 수 있었다. 수백 장의 므흣한 사진 또는 그림들을 감상하면서 혹시나 하면서 넘기는데, 허걱, 닭그네 공주가 있는 사진이 하나 있다. 닭그네와 미녀의 공통점은??? 검색 엔진의 실수가 아니었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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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10-04-09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책이죠.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친구들에게 추천도 많이 했고요 ^^

글샘 2010-04-11 23:25   좋아요 0 | URL
네, 관심없어 잘 모르던 러시아 미술사를 재미있게 읽어주는 책이예요.
근데... 러시아 사람들 이름은 좀...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