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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로쟈...만으로도 러시아 문학을 가까이 한 사람이란 느낌이 든다.
하루 천 명이 넘고, 이제까지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들락거린 서재의 주인장, 그가 낸 책을 진작에 빌려 두었지만, 조금씩 야금야금 읽다가 오늘 마지막 천정환의 발문까지 다 읽었다.
로쟈는 스스로의 블로그 이름을 '저공비행'이라고 붙였지만, 그가 <낮음>과 <날기>를 합성한 것이 그의 독서 편력과 서지학적 애정의 깊이 내지는 넓이를 측량하는 마음가짐이리라... 생각한 적이 있다. 낮게 날아야 자세히 볼 수 있고, 걷거나 탈것에 비해 나는 일은 자세함과 동시에 전체적 윤곽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니...
그의 인문학 서재를 읽기 전에도 그의 글들은 많이 읽었지만, 늘 그의 다양한 관심과 박학다식함에 감탄을 할 뿐이었다. 그의 서재에 있는 글보다 내가 더욱 사랑한 글은 '독서 평설'에 실렸던 그의 글이다. 역시 활자화 된 것이라야 제대로 글의 느낌이 살아 나는 법이다. 그리고... 내 수준은 역시, 고딩의 수준일 것이고...
스스로 이름붙인 곁다리 인문학자의 곁다리 독서 여정은 멀고도 다양하다.
남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꿈만 꾸는 일처럼 우스운 일도 없다.
그렇지만, 여느 서평집에 비하여 로쟈의 이야기 속에는 '스스로를 느끼지 않고 메마른 인간, 너무 많이 생각하는 인간'으로 평가하기도 하는 솔직함과 러시아 문학이라는 낯선 이야기들까지 동서 고금과 고전을 망라하는 세계전도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나긋나긋하지만, 간혹은 수업 내용이 졸리기도 하고, 머릿속엔 다른 상념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인문학의 기본은 말(로고스)에 대한 사랑이며 존중이다.(356)
그 유구한 언어적 전승 속에서 거장들의 내면적 고뇌와 사유의 높이가 언어에 의해, 혹은 언어 자체로서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하지만 오역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이'는 커녕(고뇌 대신에) 짜증과(높이 대신에) 장벽만을 경험할 수 있을 따름이다.
번역과 오역에 대한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말'에 대하여 많이 생각했다.
로쟈의 저공비행에 동승하여 그의 페이퍼들을 읽는 일은 '지적 낭비벽'이 심한 나로서는 많은 책을 구경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며,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정보들을 얻어들을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그렇지만,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하는 지젝의 이야기들을 비롯한 많은 철학적 언설들에 대하여... 경이보다는 짜증과 장벽을 경험하는 독서 경험을 이 책은 안겨주기도 하는 것이어서, 이 책을 읽는 일은 힘겨운 동승이기도 했다.
그의 김훈, 김규항, 고종석 이야기는 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는데, 나도 즐겨 읽는 작가들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아무래도 같은 시대를 살아 왔고, 살고 있는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짜증과 장벽이 덜하기도 했을 것이다.
김훈을 에세이스트라고 하는 데 나도 동의하고,
김훈의 문체가 아름답고 유장한 패장의 문체라면,
김규항의 문체는 자객의 문체라는 말도 멋지다.
앞으로도 로쟈의 저공 비행은 계속될 것이다.
그의 인문학적 곁다리 걸치기가 나처럼 더 많은 얼치기 독자들에게 세례를 내릴 수 있도록 '독서 평설' 수준의 이야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계속될 것이다.
자유란 위대한 선물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축복은 아니다.(62)
독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위대한 선물이지만 절대적인 축복은 아니기도 한...
독서에서 비롯된 자유 추구도 마찬가지고...
글쓰기가 자동사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무엇을 이룬다는 ‘타동사’는 자동사의 극한이며, 자동사의 미래완료형이다.(20)
과연 그럴까? 엄밀하게 나누기는 어렵지만, 자동사적인 삶과 타동사적인 삶 중 인생의 극한까지 다다르는 삶, 미래완료형인 삶은 자동사적인 삶이 아닐까? 돈을 위해, 지위를 위해, 미래를 위해 사는 타동사적인 삶이 오히려 인생의 분편화에 기여하고, 완료될 수 없는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것이 아닐까? 로쟈의 말처럼 즐겁게 읽고, 가르치면서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무엇을 위한 타동사적인 삶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인간’을 이루는 그 무엇이 아닌가?(이건 뭐, 조선일보도 아니고, 한 토막을 가지고 씹어대는 글이란...)
왜 고전을 읽는가.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는 책.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궁색한 위선을 드러내는 말.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안 읽은 책’ 그래서 다시 읽는 책, 반복해서 읽는 책.(이탈로 칼비노, 26)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다니엘 페나크, 30)
책 읽기의 즐거움은 쾌락이 아니라 향락.(32)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이 생활의 기본이 될 때 즐거운 도망이 곧 ‘즐거운 저항’이 될 때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으로 추락하지 않게 될 것(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