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습작 - 김탁환의 따듯한 글쓰기 특강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김탁환은 유명한 소설가이지 극작가이다.
김명민을 한 순간 명연기자로 알린 불멸의 이순신부터 황진이까지 소설로 그려냈고 극으로도 유명해진 이다. 그렇지만, 그의 열하광인을 나는 빌려다 두고 결국 조금 읽다 반납했으며, 리심이나 노서아 가비, 불명, 혜초 같은 작품들은 기회가 닿으면 읽은 생각은 있지만, 시간을 내서 찾아오지는 않을 정도의 그런 사람이다. 

아마도, 열하광인을 읽다 만 막연한 낯섦과 몇몇 편의 리뷰를 읽고 느낀 감이 그를 내 앞에 서지 못하게 막는 기제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가기 싫은 출장으로 KTX를 타야하는 일이 생겼다. 오가는 6시간동안 이 가벼운 책을 읽었다.
책은 매우 가볍고, 글쓰기 역시 가벼운 소재 아니겠는가 싶어서 들고 탔는데, 그닥 가벼운 내용만은 아니었다.(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이들은 글쓰기가 얼마나 힘겹겠는가만, 나처럼 놀이의 하나로 글쓰기를 저지르는 사람은 글쓰기가 가볍고 또 가볍다. 내게 무거운 것은 수업이나, 교직의 미래, 아이들의 삶과 생활... 같은 것이다.) 

안 그래도 요즘 오노레 발자크(자신은 '드'를 넣어 귀족 티를 내고자 했던) 평전을 읽고 있는데, 김탁환도 발자크에 필이 꽂힌 사람이라, 글이 재미있는 면도 있었다.
"좁은 책상의 오른편에는 작은 메모용 수첩이 있었다. 그곳에 그는 뒤의 장들을 위한 착상과 생각들을 기록해 두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책도, 명령도,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들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은 발자크가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내면에서 완성되어 있었다."
캬, 이 대목은 평전을 읽으면서 나도 감탄해 마지않았던 대목이다. 어떻게 작품의 세부를 간단한 메모로 전부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인지... 발자크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이거, 이러다가는 독자들에게서 글쓰는 힘을 확 빼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되는 대목.  

폴 오스터(달의 궁전, 빵굽는 타자기, 뉴욕 3부작 등의 작가란다.)의 말도 의미심장.
"의사나 정치가가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빵굽는 타자기에 나온다는 이야기다. 이 대목을 읽으면 빵굽는 타자기를 읽고 싶어진다. 다른 독자들도 아마 그랬을 듯. 

소설 노동자 발자크(이렇게 쓰고 나니 정말 제대로 된 직업인으로서의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의 입상을 만드는 이는 조각 노동자 로댕 뿐,
이고, 그 조각 노동자 로댕의 삶을 살피고 평할 이는 시 노동자 릴케 뿐.(72)
캬, 박경리 선생이 작가에겐 두루마리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말이 겹쳐진다.
작가든 무어든 온전한 힘을 한 군데 쏟아야만 작품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법.
먹고 살기에 허덕여서는 소설 노동자든, 조각 노동자든, 시 노동자든 실패로 가는 법. 

예술가는 테크닉과 지식의 작업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한다.(75)
예술을 하는 자의 자세.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예술의 가르침과 배움이다.
아, 학문을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었더니...
학문하는 자세를 말할 뿐~ 멋진 구절이다. 

발자크를 창조한 로댕에 대하여, 릴케가 외친 말.
그는 발자크의 모습을 이용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창조 그 자체였다.
창조의 자부, 창조의 오만, 창조의 황홀과 도취!!!
예술을 아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언어 너머의 세계가 들리는 듯 하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법은 '돌리틀 선생 항해기'를 통해 들려준다.
'귀를 대고 가까이 가야해. 멀리서 수면을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는 부족하지. 물 속에 귀를 푹 넣어. 그리고 그 아득한 침묵의 소리를 듣는 거야.'
온 마음을 다하여 바라보지 않으면 세상은 아무 이야기도 던져주지 않는다. 
저녁에 송강호와 강동원 주연의 '의형제'를 보았다.
사뭇 다른 외모와 성격의 배우들의 연기였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인간'이 참 깊다는 생각이 들었고, 감독의 세상보는 '눈'도 눈여겨봐둘 만 했다. 핵무기나 탈북 노동자, 이주 노동자와 인신매매 결혼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을 횡행할 때 여느 사람들의 눈에 그런 것들은 즉자적으로 스쳐가지만, 예리한 이의 머릿속에서는 그것들이 날줄과 씨줄이 되고, 그 새로운 세상에는 아바타처럼 새로운 '인간'이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심지어는 의형제도 맺을 수 있는. 

이 책은 스토리 디자인이란 강의를 카이스트에서 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마지막의 백년 학생, 천년 습작이란 말이 인상적이다. 

마지막에 참고 도서가 아니라, 강의와 함께 읽을 작품 목록...(욕심도 크다.)
발자크는 이미 거의 다 읽어가고, 빵굽는 타자기는 꼭 읽어야겠고,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도 이미 읽었다.
아니 에르노의 글들에 대한 소개가 있는데, 부끄러움, 칼 같은 글쓰기, 집착... 같은 책들은 한번 만나고 싶기도 하다. 발자크의 소설들도 찾아 읽어야 한다. 

하지만, 인생에서 늘 그렇다고 금아 피천득 선생이 그랬듯,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그때 만나지 말았어야 했던 만남도 있는 법이니...
백년 학생의 천년 독서는 오리무중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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