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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도둑놀이
퍼 페터슨 지음, 손화수 옮김 / 가쎄(GASSE) / 2009년 9월
평점 :
이 소설을 성장 소설로 보기에는 '삶이 지나치게 잔혹'하다.
성장 소설에는 아이가 자라는 시간과 주변 시간이 서로 교통하면서 영향력을 행하는 과정이 드러나는데, 이 소설에서 재미를 주는 원동력은 역시 '성장'이지만, 나에게 감흥을 주는 라인은 나이든 화자가 회상하는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감상편이었기 때문에 성장 소설이란 말을 굳이 쓰긴 싫다.
어린 시절의 친구네 집에 얽힌 상처,
그 친구네 집과 화자의 집에 얽힌 관계,
아버지와 친구 어머니의 레지스탕스 경력과 사랑,
나이든 화자의 이웃과 어린 시절 친구의 동생, 그리고 딸의 등장.
이런 스토리 라인이 복잡하게 시점을 얽어들면서 등장하는 이 소설은 그것이 독자에게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독해력이 조금 떨어지는 독자라면 그것이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을 듯 싶다. (내가 고급한 독자란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소설을 휘리릭 읽어치우는 스탈이기때문에 이렇게 플롯을 꼬아놓으면 한참 재미있게 읽다가, 뭥미? 하는 대목을 만나기 때문이다.)
퍼 피터슨이란 작가는 그러나, 친절하게도 휘리릭 독자인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준다.
집을 구입하고 보니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 모든 걸 한꺼번에 수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난 하나씩 고쳐나가기로 결심했다.
그건 내게 딱 알맞은 일이기도 했다.
내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딱히 갈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좋아했다.
한 번에 듣기에 지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고 신중하게, 그리고 진솔하게 얘기를 해주면 듣는 사람들은 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과 달랐다.
그들은 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에 대해서 알게 될지 모르지만 내 감정과 의견, 내 생각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내게 일어났으며 그 과정에서 내가 내린 결정들로 인해 어떻게 지금의 내 모습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서는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바로 내 이야기에 자신들의 감정과 의견을 대입시키고 유추하며, 자신들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삶을 마치 소설처럼 만들어 내는 것이다.(100)
작가는 시간이 많으니 조금조금 이야기를 하면 된다. 그것과 집을 수리하는 것은 유사한 추리다.
그리고 독자들의 몫은 바로 작가의 이야기에 독자의 감정과 의견을 대입시키고 유추하며 읽는 작업이란 것이다. 그러니, 역시 작품은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음, 오독이란 없다.
"지금이 아니면 우리에게 기회는 없어!"
그리고 아버지는 빗속으로 달려 나가 벌거벗은 몸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팔을 벌리고 어깨로 떨어지는 빗물을 받으며 춤을 추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나도 소나기 속에 몸을 묻었다.
껑충껑충 뛰며 노래를 부르자 아버지도 나를 따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126)
아, 아버지의 이야기를 읽으면,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를 보며 자랐고, 이제 아버지가 된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아들의 머릿속에 그려질 아버지의 모습에 대해서...
2000년에는 컴퓨터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뉴스.
그게 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는 있을지도 모르는 재앙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노르웨이 산업계는 이 문제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
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무리의 전문가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한 가득의 실마리조차 없으면서 그저 한 밑천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단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한 밑천을 잡았을지도 모르는 일.(133)
아, Y2K 문제에 대한 이렇게 쌈박한 규명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
권력이 움직이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이렇게 볼 수도 있는 소설.
참, 오늘 아침에 식사를 했던가? 난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의 일이 너무나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 이후의 일도 마찬가지다.(224)
문득 오랜 시간을 홀로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의 생각 속에 잠겨 있다가 느닷없이 그 생각의 한 부분을 입밖으로 내어 놓는 것.
침묵과 대화의 경계가 생각이라는 행위로 인해 흐려지는 것.
생각 속에 거주하는 몇몇 되지 않는 사람들과 일상에 대한 끝없는 내면의 대화가 어느 순간 갑자기 불거져 나오는 것.
내면의 생각과 외면의 대화 사이의 경계가 고립된 생활로 인해 희미해 지는 것.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 그 희미한 경계를 넘을 때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
이것이 미래의 내 모습이란 말인가?(225)
이런 대목들이 내가 이 소설을 '성장 소설'이라기 보다는 '노년에 대한 고찰'로 보는 까닭이다.
외등을 꺼버렸다.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니 어슴푸레한 새벽빛을 배경으로 그 윤곽만 조심스레 드러내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해가 뜨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강을 향한 나뭇가지 사이에 어렴풋한 분홍빛이 마치 크레용이 남긴 자국처럼 스며들어 있었다.(265)
내가 고요히 살고 싶은 노년이 이런 것인데, 아, 노르웨이의 숲으로 떠나야 할꺼나.
"다친데는 없니?" "없는 것 같아요."
"그저 조금...... 네 영혼의 한 부분?" "아주 조금... 예, 그럴지도 몰라요." (303)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아버지의 다사로움은 강인함 사이로 이렇게 파고 든다.
흐르는 물은 나의 벗이었다. 우리는 북쪽으로 향하고 강은 남쪽에서부터 시내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325)
시간은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흐른다.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또는 교차하거나 거스르는 방향으로...
아버지가 남긴 작은 돈, 그것마저 국경 밖으로 가져갈 수 없게되자, 어머니는 내가 성인의 양복을 사 주신다. 그 양복을 입고서 마지막 멘트를 날린다.
"언제 아픔에 굴복할지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우리들 자신"이라고.
노르웨이어를 전혀 모르지만, 그의 문학을 만나게 된 일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퍼 페터슨의 글을 또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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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쪽에서 '제발'이란 말을 '플리즈~'로 바꾸어 주었으면 한다.
독일어의 Bitte!를 제발로 번역하는 건 좀 우습다.
Stop, please! 를 정지, 제발...로 해석하는 건 좀 아닌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