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조 가족 카르페디엠 17
샤일라 오흐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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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원제목은 "세상의 소금과 어리석은 양" 정도다.
Das Salz der Erde und das dumme Schaf. 

두 사람의 대화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그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신선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결코 신선하지 않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실에서 살고, 늘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는 할아버지와 사춘기 소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야나는 너무 심심한 나머지 '목소리들'과 어울리고,
할아버지는 폐지를 모아 파는 일을 하면서, 철학 책에서 주워들은 말들을 제법 멋지게 쓴다. 

참된 우아함이 머물 곳은 우리 영혼밖에 없어.(16) 같은 말. 
어느 집이든 살림살이에는 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 같은 말. 

열여섯 손녀의 투정에 할아버지는 '인생에서 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조금'이라고 가르쳐주기도 하지만... 야나의 꿈은 훨씬 가볍고 크다. 

야나에게 남자 친구도 생기고, 일상이 조금 즐거워질만도 한데, 할아버지와 야나는 이별의 기로에 서게 된다. 각자 양로원과 고아원으로...  

첫 데이트를 하러 가는 길은 한 소녀의 영혼의 일기장 속에 황금빛 편지들과 함께 기록되어 지우려야 지울 수 없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 소녀의 가슴에는 지극히 순수한 감정의 보석이 남아 있어, 이어지는 다른 경험들을 통해 값을 따질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보석으로 연마된다고 한다. 그런 소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라면, 번쩍이는 태양처럼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할지도 모른다.(33)
이런 구절을 독일어로 읽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 소설의 매력은 이야기 자체보다는, 중간중간 감초처럼 숨겨져 있는 멋진 구절들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한다. 

"너 같이 예쁜 여자애를 동정해야 할 이유가 뭔데?"
캬~, 이르카 요놈, 여자 꼬실 줄 아네. ^^ 이 한 마디에 야나는 이르카와 연인이 되고 만다.
물론 그들의 첫사랑은 참으로 유치찬란하지만... 세상에 유치찬란하지 않은 연애가 어디있으랴.
그들이 영화관으로 향하는데...
달콤한 예감에 빠진 나는 가슴과 위장 사이의 공간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알다시피 거기는 영혼이 자리잡은 곳이었다... 아름다운 표현이다.
몇 제곱 센티미터의 살갗 위에서 희망과 절망의 핵폭탄이 될 양성자와 중성자가 복작거리고 있다. 손가락들 사이의 거리가 끊임없이 줄어든다. 이윽고 찬란한 합일의 순간이 다가온다. 한 손이 다른 손에 닿는다. 영혼 속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예민한 감정이 솟구친다... 이런 짜릿한 순간의 묘사가 이 글의 압권이다. 물론 그 다음 장면의 엽기적임이 또한 이 소설의 재미이고...

그래서 우리는 좌석의 푹신한 쿠션에 몸을 파묻고, 질주하는 자동차의 속도감을 즐겼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호사를 누렸다... 야, 누가 이 상황이 경찰서에 잡혀가는 이야기라고 믿겠는가. 

문제가 생긴들 할아버지에겐 문제 없다.
"죽음처럼 복잡한 문제는 내가 해결할 테니, 삶과 같이 간단한 문제는 네가 해결해라. 꼭 그러길 바란다."
음,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던질 말 치곤 얼마나 멋진가. 

할아버지와 손녀의 마지막 대화가 이 소설의 제목이다.
"할아버지, 우리가 누구라고?" 
"우린 이 대지의 소금이야. 멍청한 양이 우리를 남김없이 핥아먹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그런가. 아무리 삶이 팍팍하고 힘들어도 인간만이 세상의 희망인 것일까?
아, 그리고, 또... 인간은 멍청한 양들이 그 소금을 남김없이 핥아먹게 될까 늘 걱정하는 존재인 것인지... 좌충우돌 할아버지와 손녀의 유쾌한 이야기를 따라 오묘하고 짜릿한 소설 한 편을 읽는 맛은 뭔지 재미보다는 울렁거리는 '삶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 이 책의 옥에 티 한 점.

21. 살을 '애는' 추위... '에는'이 맞다. 기본형 '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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