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21)  

이 구절은 줄글로 이어져 쓰인 것인데, 모든 뒤에 쉼표를 넣은 김훈의 정성을 고려하여 행을 바꾸어 본다. 부질없는 노릇이지만...
이 글을 읽은 것만으로도 이 시답잖은 책에 별 다섯을 기꺼이 준다.
노무현이란 한 현상의 죽음 앞에서 떠오른 화두, '사랑'을 김훈은 이렇게 쓴 것일까, 생각했다. 

젊은 시절엔 자신의 혈기도 돌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눈길을 멀리 던지지 못한다고...
그러나 나이가 들면 몸이 차가워지면서 시선이 저절로 멀리 멀리... 밖으로 뻗어나간다고 하는데...
김훈은 외려 먼 시선을 거두어 자꾸만 자기 속으로 침잠하려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에 대한 글들이 맨 앞에 가득했다.
이 책의 비중은 앞에 쏠려 있다.
뒷부분은 나이든 이의 눈길답게 박경리를, 김지하를, 임꺽정과 이순신을 관조하지만... 

삶을 살아내는 자들은 삶을 설명하거나 추상화하지 않는 모양이다.(칠장사에서)
그 말을 소쉬르의 언어이론을 빌려서 랑그와 빠롤로 설명한 대목으로 리뷰 제목을 붙였다.
새들은 랑그가 아니라 빠롤로 원양을 건넌다고...(랑그는 머릿속의 언어이고, 빠롤은 실제화된 언어다.)
추상 속의 말하지 않는 자들의 생각... 랑그로만 가득한 지식인들을 그리려던 그의 남한산성은... 그래서 스스로 실패했다고 말하잖는가.
이순신의 간결한 빠롤들. 그 빠롤들의 보고, 난중일기를 그는 그래서 사랑한다. 

그의 글맛은 '글과 몸과 해금'같은 작품에서 오롯이 살아있다. 

글을 쓸 때, 내 마음 속에는 국악의 장단이 일어난다.
휘몰이 장단으로 글을 쓸 때, 내 사유는 급박하게 솟구치는 언어 위에 서려서 연결되거나 또는 구부러진다.
힘이 빠지면 내 문장은 중모리쯤으로 내려 앉는다. 사유는 문장 속에 편안하게 실린다.
휘모리 문장을 쓸 때는 사유가 문장을 몰고 가지만
중모리 문장을 쓸 때는 문장이 사유를 이끌고 나간다.
한 개의 문장을 하나의 우주로 만들어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때,
나는 진양조로 나아간다.
휘몰이는 날뛰고 걷어차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진양조는 뱀처럼 땅을 밀면서 나아간다.
나는 글을 몸으로 쓴다.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없으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언어는 버림받는 애인처럼, 징징거리면서 끝까지 나를 따라온다.
나에게 간절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징검다리 건너편에 있는 실체이지만,
나는 늘 징검다리 위에 있다.
그의 언어관은 그래서 슬프다.
최하림의 시, "이제는 날개도 보이지 않고 날아가는 새여"에서 바라본 시간의 무늬도 같은 것이리라. 

2부에선 비로소 그가 관조에 든다. 김지하가 "나는 부패한 정권, 무능한 권력과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고 한 대목은 그의 생각이 결핍된 대목이다.
오치균에 대한 생각도 읽을 만 하다. 

색은, 색과 색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군집으로 존재하는 수밖에 없다.
움직이는 색, 이행하는 색, 정처없는 색...
사북의 아름다움은 자연스럽게 무너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이다. 그 부조화한 빨강과 파랑이 내 가슴을 때렸다. 녹슨 양철지붕 위에 눈처럼 쌓인 탄가루는 아름다웠다. 

사북의 지난 일을 알지 못하고 그린 오치균의 그림은 리얼리즘의 승리일 것이다.
등줄기가 오싹하고 주체할 수 없는 기분, 심연의 바다 속에서 건져낸 유적처럼 그러나 퇴색된 화려한 색들은 골동품처럼 품위를 지닌... 아, 이런 표현은 뭔가, 예술적이다.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아무런 당파성이 없는 인간이다. 너무나 무서운 존재여서, 정말로 살려둘 수가 없는 존재로서의 이순신을 그리워한다.  그는 사실만을 가지런히 챙기는 문장을 좋아한다. 

칼의 노래의 서문에서,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울었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내 거기서 한 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이렇게 쓰고 있다.
영웅이 아닌 노무현은 부시라는 파트너를 만나,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었을까?
노무현이 대통령으로서 이 책을 선전했던 일이 기억난다.
그가 진정 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그는 일자진으로 부딪치지 못했단 생각이 아쉽기는 하지만...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세상의 더러움에 치가 떨리고,
세상의 더러움을 말하면,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까워서 가슴아팠다는 <밥벌이의 지겨움> 서문은 참 김훈답다. 

김훈의 글들은 늘 실제와 그 사이의 징검다리 위에 서있는 것이 맞지만,
그의 말들은 자전거 기행처럼, 실제에 가까이 섰을 때 더욱 돋보이는 것 같다.
한국이란 사회가  빚어낸 김훈이란 괴물체에 가까이 다가서는 언어들은 왠지 자꾸 왜곡을 겪는 자기장이 스스로 감지되어선지, 글이 버석거리고 낯설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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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9-05-27 22:38   좋아요 0 | URL
매력적인 구석이 군데군데 보여요. ^^
전체적으론 버석거리구요.
마음이야... 어디 늘 내 안에 있던가요? 오락가락하는 거죠.
내일은 봉하마을이나 한번 다녀올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