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을 넘어 도망친 내시의 아내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102
진재교 지음, 김숙경.김혜리.이영림 그림 / 나라말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엔 열 편의 야담 속 이야기, 즉 소품문들이 들어 있다.
조선이란 나라는 근 백여 년에 걸쳐 '유교적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 온갖 힘을 쓴다.
우선 법적으로 질서를 잡아 <법치국가>가 되었고,
훈민정음이란 문자까지 개발하여 조선 건국의 정당성, 충성과 효도를 이념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훈민정음으로 만든 최초의 책이 조선 건국 정당성을 이야기한 용비어천가이며,
널리 펼쳐낸 책이, 소학, 삼강행실도, 두시언해 등이다. 왜 이태백 시는 안 가르쳤는지 알 만하다.
아직도 세종이 '어리석은 백성을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들었다는 '선언'을 믿는 이는, 모 대통령이 '정치가는 공정하고 깨끗해야 한다.'고 한 말을 믿는 거나 같다.)
성리학을 정립하는 데 이황과 이이 등의 공도 컸다. 

조선 후기, 세계가 좁아 지면서 외국 문물이 들어오고, 자유로운 사상의 폭발이 일어날 즈음,
마치, 최만리가 훈민정음이란 '특이한 현상'을 한자라는 '일반적 사상'을 잣대로 반대했듯이,
소품문 또는 야담이라는 '충효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을 '유교'란 잣대로 폄훼하려 한 것이 정조의 문체반정 같은 사건들이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에 미디어법을 만들려는 작자들과 마찬가지로,
바가지로 벼락을 막는 노릇이었던 셈. 

이 책에 실린 열 편의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눈을 쓸면서 옥소선을 엿보다 - 평양 감사의 아들과 기생 옥소선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소설)
그리운 임과 다시 만난 일타홍 - 정승 심희수와 아름다운 기생 일타홍의 사랑
담을 넘어 도망친 내시의 아내 - 내시의 아내와 스님이 맺은 인연
운명처럼 만난 소복입은 여인 - 한 선비가 불길한 운수를 앞에 두고 점을 쳐서 점쟁이가 시킨대로 처신하여 미인도 얻고 과거에도 급제한 이야기
우하형과 죽음까지도 함께한 여종 - 관청에서 종노릇을 하던 천한 신분의 여성이 합리적인 사고로 자기 인생을 치밀하게 설계하고 실천하여 자신이 원하는 남성을 택한 이야기
꽃다운 아내와 재복을 얻은 채생 - 역관 무역으로 부자가 된 김노인이 청상 과부가 된 자기 딸을 위해 몰락한 양반 가문의 채노인 자제 채생과 인연을 맺게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
양반 가문의 청상과부와 인연을 맺은 권생 - 권생의 친구가 이야기를 꾸며 권진사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개가의 문제를 다룸
궁색한 참의 댁 아들, 암행어사 되다 - 몰락 양반 관상의 사건을 통해 관상을 잘 본 것은 아니란 이야기
남편을 스스로 택한 지혜로운 여종 - 대감의 여종이 마음에 드는 배우자를 직접 선택하여 부부가 되고, 마침내 요술 바가지를 얻어 부유하게 되며 신분도 상승한다는 이야기
기생에게 통쾌하게 복수한 갖바치 - 천민 신분으로 갖바치 신세이던 형제가 역관 집 출신으로 주점하는 여성에게 당한 수모를 앙갚음하는 이야기  

아, 이 책의 주인공들로 등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그 여성들은 남성 선택에서 적극적이며, 아주 지혜로워서 재미를 주는데...
역시, 조선의 국가 정통성을 보장하는 '유교적 충효'의 질서에 맞지 않은 글들이므로, 주류가 되지 못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대통령님의 라디오 방송이 인기를 얻지 못하듯이, 백성에게 이황의 이기론이나 기대승의 사단칠정 같은 허황된 놀음이야 재미가 있겠는가.
기득권자들이 되도 않은 이야기로 취급하는 패러디와 변형들이 글자로 채록되는 것을 조선을 결코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두고두고 전수되는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너무 도덕적!이다.(껍데기만 그렇다.)
교과서에선 아직도 충효를 가르치는 소학과, 삼강행실도는 그대로 실려있다.
문학 책엔 두시언해의 우국충정은 여전히 강조된다. 이태백의 개성과 자유로운 영혼은 아직도 치지도외... 창밖의 태백이다.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인 교과서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은... 후아,
가장 멋진 섹스 산업을 자랑하는 강남의 룸싸롱들과 나이트들은 가히 세계적이지 않을까? 

고전 산문, 특히 소품문에 맛을 들인 바람돌이님이나, 그 책을 읽고 싶어하시는 순오기 님께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조혜란의 '옛 소설에 빠지다'를 재밌게 읽은 분이라면, 이 책도 일독을 권한다. 

조선 여성들의 멋들어진 지혜를 '베니스의 상인' 이상으로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고전소설을 읽어야 할 고교생들이라도 읽으면 좋을 책이다.
특히, 아직도 '병신같이 아버지-남편-아들-손자'의 뒤를 따라 살다 죽는 '현모양처'가 삶의 목표인 멍청한 계집애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오류 발견 하나
103 설명에선 겉섶으로 잘 쓰고 있으나, 그림 설명에서 겉섭으로 되어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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