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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을 들은 건,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쇼킹한 제목을 보고서이다. 그러나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시사저널 편집국장이란 명함을 보고서 그를 속단했던 것일까. 그가 별로 읽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니, 신성한 척 하고 있으면서도 누구나 갖고 있는 속내를 드러내 버리는 걸 우리 문화는 싫어하지 않는가. 너무 도발적으로 들렸던 것이다.
책의 서두에,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 값 월부를 갚으려 하니,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 하고 쓴 작가를 들어 본 적도 없다. 이거 시간 낭비 아닐까?라며 읽기 시작하고, 기인(奇人)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어보니, 유홍준 다음으로 글을 맛지게 적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벼이 하룻거리로 들고 갔다가는 화장실에서 두고두고 야금야금 열흘 정도를 읽었다. 내가 그에 대해서 편견을, 선입견을 가진 이유를 지금 곰곰히 씹어보면, 그가 쓴 책들의 제목이 너무 도발적이어서가 아니었을까. 한다. 칼의 노래는 소설이니 그렇다 치고.
유홍준의 남도답사일번지를 읽을 때, 돌담사이로 얼굴을 내민 능소화를 들으면서 능소화가 어떤 꽃인지도 모르면서 너무도 반했던 기억이 새롭다.
유홍준이 역사의 틈바구니를 관광전세버스를 타고 옮겨 다니면서 낯선 것들을 재미난 입담으로 읽어준다면, 김훈은 자전거를 타고 느리게 달리면서 익숙한 것들을 낯설지 않게 풀어내는데, 그 눈이 신선하다. 특히 꽃피는 해안선...
향일암에서 본 동백꽃 -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매화 -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 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품어져 나오듯이 피어난다... 꽃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꽃구름은 그 경계선이 흔들리는 봄의 대기 속에서 풀어져있다. ...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산수유 -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목련 - 산수유가 사라지면 목련이 핀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참혹하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이건 시다. 이런 시를 써 내려면, 적어도 꽃 하나를 품에 안고 몇 년간을 곱씹어 올린 고갱이가 아니면 안된다. 하기야 그가 자전거를 타면서 뭘 했겠는가. 언어와 함께 달리지 않았겠는가. 달리면서 그의 뇌리에선 매화가 동백이 산수유가 목련이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길 수천 수만번 거듭했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목련이 진 무거운 자리처럼 각인된 말들이리라. 마치 우리가 살아낸 무거운 삶의 단편처럼.
이젠 그의 글을 다 읽고픈 맘이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