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속의 편지 창비시선 105
강은교 지음 / 창비 / 199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대학 시절 강은교 시인을 좋아했던 이유는, 건조함과 사랑 사이의 절묘한 긴장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민중문학이 주도권을 잡던 그 시절, 리얼리즘의 승리를 부르짖던 그 때, 강은교의 시는 민중의 아픔을 에둘러 드러내어 주었고, 난 그런 수사를 통해 세상에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눈을 감는다고 세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90년대 넘어서면서 시인의 관심도 역시 세계로 돌아온다. 시가 더 좁아지고, 더 작아지고, 결국 한 사람만큼의 시가 된다. 그러면서 시는 더 넓어지고, 더 커지고, 결국 한 세계의 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가 양파들이 구멍 숭숭 포대 속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은, 그의 시가 넓어진 증좌이자 그의 시가 깊어진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데, 자꾸 아쉬운 건 왤까. 그의 사랑법이, 그의 헤매는 발길들을 위한 노래가 맴도는 건, 나약한 나 자신에 대한 자기 방어 기제가 살아나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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