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오년이 넘은 누렇게 찌든 책을 책장에서 뽑았다. 속표지에는 내 친구가 사준 책이라고 적혀 있다. 수정이는 참 시를 좋아하던 친구였다. 늘 시를 쓰고 읽고, 나중엔 자기 시를 내게 보여주기도 했지만, 한번도 시원스레 좋은 시라고 평해준 일이 없이 십년 너머 못만나고 있는 사실이 좀 아쉽다. 그 친구는 아직도 시를 쓰고 있을까? 가끔 아련하게 생각난다. 특히 고은을 보면. 그 친구가 고은을 짝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고은의 '부활'이란 시집을 보고 누구는 일기장이라고 했다. 그렇다. 부활에는 '동해창망하라'로 시작하는 서사시의 부활이 있고, 우리는 보지 못하는 대자연의 섭리를 그의 눈은 읽어내는 신기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고은을 읽는다는 건 내게는 치열했던 청년 시절을 반추한다는 것이고, 관념적 세계의 지적 유희를 맘껏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의 후대 시가 훨씬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초기 시가 갖는 상징성은 나를 그의 시에 몰입시킨다.고은을 읽으면 그를 이해할 수 없어서 좋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건지 정확히 형상화되어 있지 않아서, 내 마음껏 내 상상을 하며 '동상이몽'의 즐거움을 누려보는 것이다.나는 그의 '만인보'를 싫어한다. 단순한 이유는 '만인보'는 돌아보기 싫은 내 젊은 스무살의 비극적 현실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만인보를 읽노라면, '동상이몽'의 몽환적 즐거움을 놓치게 되는 까닭에...만인보에서 박혜정을 읽고 나는 울었다. 내 갈갈이 찢어진 속내를 어쩜 고은은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며 흘겨보고 있었을까. 아아, 그이는 이미 이생에서 흘릴 눈물 전생에 다 흘리고 난 이일까. 오랜만에 고은을 읽으며 세상 만물의 자리매김을 확인할 수 있어 좋다. 강아지도 매일 킁킁거리며 확인하는 세상의 존재를, 무시하며 살고있는 내 어리석음을 통찰하는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