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삶이냐 홍신사상신서 24
에리히 프롬 지음, 정성환 옮김 / 홍신문화사 / 1991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학급문고로 사 두었더니, 아이들이 의욕을 갖고 펼쳐본 다음, 서문의 omniscient의 철자 잘못된 것만 찾아 놓고 읽지 못한 걸 보고 픽-하고 웃었습니다. 하나는 아이들의 수준이 우스웠고, 또 하나는 이런 어려운 책을 아이들 책꽂이에 꽂아둔 내가 우스웠기 때문입니다. 이젠 거두어 들여 내가 대학교 시절 생각하며 다시 읽어 보니, 생각이 변했기 때문인지 상당히 새로운 내용인 것 처럼 보였습니다.

내가 대학교 새내기 시절에 접했던 에리히 프롬의 책은 의식화 서적처럼 여겨졌던 거 같다. 무의식으로 둘러싸인 멍청한 신입생을 의식화시킬 수 있는 책이긴 하지만, 그 당시의 의식화란 단어가 떠올리는 부정적 이미지는, 에리히 프롬의 저서들 마저도, 호기심보다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관점에 대해 친구들과 토론할 때에도, 사회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어렴풋한 기억이라 착각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제 이십년 가까이 지나서 다시 소유냐, 삶이냐를 뒤적여 보니, 나의 생각의 흐름이 그대로 적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동양의 불교적 세계관과 서양의 에피쿠르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지금-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의 중요함, 그 사건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들... 물론 사회학적 분석이 뒤따르고, 극단적으로 성경 분석까지 들어가지만, 성경에는 별로 고증학적 관심이 없어 휘리릭 넘겨 버렸다. 82쪽 부터 나오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소유와 존재의 개념이 인상적이었다.

가난한 사람이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사람이다. -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탐욕을 갖지 않는 사람이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지식을 소유물, 도그마의 성질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물질과 행동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말이다. 소유물에게, 심지어 신에게도 얽매이거나 속박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속박되지 않고, 물건과 자기의 자아에 집착하려는 갈망을 벗어난다는 의미의 자유는 사랑과 생산적 '존재'를 위한 조건이며,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보다, 자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 따라서 선하게 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하며, 행해야 할 일의 수나 종류를 강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당신의 작업의 토대가 되는 기본적인 것을 중시해야 한다.

존재는 소유의 반대이며, 자아구속, 자기중심주의의 반대이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 존대는 능동적이라는 의미로, 자기의 인간적 힘을 생산적으로 나타내는 고전적 의미이다. 즉, 그는 존재를 끓는, 낳는, 그 자체 안에서 그리고 그 자체 밖으로 자꾸 흐르는, 달리는 것으로 파악한다. 끊임없이 달리고 움직이며, 달리면서 평화를 추구하고, 가득 참에 따라 늘어나므로 결코 가득 채워지지 않는 그릇과도 같다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능동성의 조건은 소유양식을 파괴하는 것으로, 그의 가장 높은 미덕은 생산적인 내적 능동성의 상태이며, 이 내적 능동성의 전제는 모든 형태의 자아 구속과 갈망을 넘어서는 것이다.

---- 무엇을 가지려고, 소유하려고 욕심부리며 사는 데서 욕망과 추잡한 삶과 죄악과 질병이 생긴다. 자기를 어디에도 구속시키지 않고 자유로운 삶의 존재로 놓아두는 구름같은 삶.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런 삶. 스스로 그러한 산처럼, 물처럼, 바람소리와 솔향기처럼 산새소리와 들풀 향기처럼, 그저 있고 싶다. 열린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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