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나비 - 2003년 제2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인숙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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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바다를 건너다니... 세상에는 저런 거짓말도 있구나. 그러자, 내가 같이 살고 있는, 그리고 내 아이의 아빠라는 남자가, 내게 기생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별것 아닌 것처럼도 여겨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거짓말들 중에, 내가 꿈꾸었던 행복이라는 이름의 거짓쯤은 별것도 아닌 것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누군가를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었다.

김인숙이 살아온 시대와 내가 살아온 시대는 대부분 겹쳐지는 삶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상징성들이 내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익숙한 구체성으로 다가오는 걸 보면... 그의 나비는 바다를 건너고 있다. 그러나 그 나비는 공주처럼 저려서 새파란 초생달이 시린 김기림의 나비보다도 훨씬 처절하다. 이 시대가 낭만적 '서거푼'(서글픈) 나비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내 생각이 맞을거다. 이 시대는 소줏집 포장마차에서 술을 기울이며 '인숙아'하고 부를 뿐인 선배 문인들처럼, 더 이상 말을 잇는다면--- 그건 몸통만 남은 나비 내지는 몸통은 녹아내리고 날개만 녹아 뚝뚝 흘러 내리는 나비에 불과할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모더니즘 작가 김기림과 같은 제목의 '바다와 나비'를 읽는 것은 삶의 진실은 이런 것인가, 서글프고 그 한에 묻혀 살아갈 따름인가... 하고 생각한다. 포스트 모던한 김인숙이나 모던한 김기림이나, 시대의 아픔을 상징으로 드러내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나비를 설정한 건 우연일까, 아니면 수십년의 연도를 건너뛴 원형적 상징일까. 전상국의 작품을 읽게 된 건 기쁨이었지만, 소감은 역시 포스트 모던의 시대구나. 싶어 씁쓸하다.

이번 이상 문학상의 절창은 김인숙과 복거일의 동거에 있다. 복거일은 쇼우와 64년을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로봇의 시대로 상상력을 넘치는 거 같지만, 김인숙의 소설 속엔 진실이 넘실대는 반면, 복거일의 소설엔 진실성은 부족하다. 복거일씨, 당신은 그 영어공용어의 공룡같은 이상을 왜 진실성 풍부한 소설에 담아내지 못하는가. 어설픈 조선일보식 파시즘의 전파에 가장 적절한 양식이 소설임을 당신은 모르는가?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에 드러난, 어슴프레하게 나타난, 영어의 시대가 가고 중국어의 시대가 도래할 지도 모를 때를 대비해 자식을 중국에 유학 보내는 이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이 '얼어죽을 공룡어론'으로 오버램 되는 건, 내 상식의 무지함의 소치다. 플라나리아 보담은 김인숙의, 아니 그 신랑의 외침이, 술에 취해 술주정 속에서나 담아낼 수 있는 포스트 모던의 절규가, 모더니즘의 낭만보다 비극적임은, 내 삶의 적당한 낭만적 절규보담은 삶의 진실성에 앞선다고 읽는다. \김인숙씨의 착실한 진보에 박수를 보내며, 복거일의 몰락에 탄성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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