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복거일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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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 국제어로 자리잡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영어를 우리말과 공용(共用)하다가 결국은 공용어(公用語)로 공식화해야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민족주의적 열정을 넘어선 것이다. 우리가 내일 아침부터 당장 영어로 대화할 수 있고, 영어로 문학 작품을 써 낸다고 해도, 우리의 언어에 함축된 정서를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말에는 조상들의 숨결과 함께 우리의 오롯한 삶의 흔적이 담겨 있고, 우리 문화에서 비롯된 의미들을 가장 잘 내포할 수 있도록 진화되어 왔다.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언어로 우리의 정서를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다.

공용어로 영어를 채택한다고 해도, 결국은 영어교육의 강화 이상의 해결책은 없다. 저자의 의견처럼 얼토당토 않은 의견조차도 '마이너리티 리포트'로 제시될 수 있는 사회는 원숙하고 성숙한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간 얼마나 이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냉혹해 왔던가. 80년 광주의 학살 장면을 본 외국인들이, '그들은 소수민족인가, 이교도인가'하고 물었을 정도였는데…. 그의 의견은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로 무장한 '가진자들의 조율된 거대 담론'이었던 것이지, 결코 개인 차원의 사견(私見)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영어를 원어민처럼 유창하게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선천적으로 태아일 때부터 영어로 된 어머니의 생각을 전달받고 주변 문화를 영어로 접하는 아이들과, 식민지처럼 어색하게 강요된 영어 문화로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은, 일단은 문화적 상하계층으로 대별될 것이며, 우리 민족처럼 소수어에 물든 하등 계층은 불평등의 심화에 따른 피해자로 남게 될 것이다. 저자가 예로 든 필리핀, 인도, 말레이시아 등의 예는 이런 예로 합당할 것이다.

결국 이 불평등은 재생산되고 영어를 상대적으로 쉽게 배울 수 있는 기득권 계층은 새로운 상승계층으로 신분이 오를 것이고, 미숙한 발음과 유창하지 못한 더듬거리는 읽기 능력밖에 익히지 못한 소외계층은 현대판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문맹률을 낮춘 데에는 중세 봉건시대의 반-상(班-常)계급에 따른 피해 의식이, 식민지 시대에 와서 내지인-반도인의 구도에서는 그 질곡이 심화된 형태로 나타나 해방 후에도 '내 자식은 배워야 산다.'는 빗나간 향학열의 역할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영어를 공용화로 하고, bilingual의 시기가 지나면 영어를 국어로 사용하면 되고, 우리 모국어는 박물관 국어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그 자신이 새 시대의 지배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는 종류의 집단에서나 상상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책은 '비명(碑銘)을 찾아서' 소설같은 상상력의 발현이 아니었을까……. 호접지몽 : '나는 주(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만일 그런 일(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 정확히 말하면 참새가 어디에 떨어지느냐의 차이)이 일어난다면, 사건의 연쇄 반응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갈 것이다. 이 세상의 피륙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문득 날카로운 비명을 내며 찢어져서, 어느 먼 곳에 전혀 다른 세상이 생길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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