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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 시가 있는 아침
문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보통, 축혼가 하면, 요시노 히로시의 것도 지나치게 쿨하다.
축혼가 / 요시노 히로시
두 사람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어수룩한 편이 좋다
너무 훌륭하지 않은 편이 좋다
너무 훌륭하면
오래가지 못한다고 깨닫는 편이 좋다
완벽을 지향하지 않는 편이 좋다
완벽 따위는 부자연스럽다고
큰소리치는 편이 좋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인가
장난치는 편이 좋다
발랑 넘어지는 편이 좋다
서로 비난할 일이 있어도
비난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었는지
후에
의심스러워지는 편이 좋다
바른말을 할 때
조심스레 하는 편이 좋ㄷ다
바른말을 할 때
상대를 마음 상하게 하기 쉽다고
깨닫는 편이 좋다
훌륭해지고 싶거나
올바르고 싶다고
마음 쓰지 말고
천천히 느긋이
햇빛을 쬐고 있는 편이 좋다
건강하게 바람에 흔들리며
살아 있는 것의 그리움에
문득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날이 있어도 좋다
그리고
어째서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잠자코 있어도
두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길 바란다.
그런데... '김광규의 축혼가'는 왜 이리도 슬픈가...
스무 살 갓 넘은 나이에
학예회에 출연한 아이들처럼 즐겁게
부부가 되어 이들은
평생을 함께 살기로 굳게 약속하고
일가 친지가 모인 자리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사진 쵤영에 신이난 신랑 신부를
모두들 축하할 뿐,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걱정도 하지 않았다 주례사의
말이 좋아 그렇지 인생의
망망대해 또는 이백만 대의 자동차가 들끓는
서울 거리로 이렇게 떠나보내다니 아무래도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전문)
시의 의미를 알았다는 이에게 말라르메는 이렇게 말했다던가.
"당신은 저보다 운이 좋으십니다."
시를 읽어주고, 짧게 자신의 단상을 적어 내는 문정희는... 나보다 운이 좋은 이인가 보다.
너희는 하늘만이 진실이라 믿지만
하늘만이 자유라고 믿지만
자유가 얼마나 큰 절망인가는
비상을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진흙밭에 뒹구는
낟알 몇 톨
너희가 꿈꾸는 양식은
이 지상에만 있을 뿐이다
새여,
모순의 새여(모순의 새 부분, 오세영)
추락하는 것은 행복일까? 아니면, 날개가 있어 비상했던 것들이
비로소 추락할 때라야만, 바하만의 이야기처럼, 절망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황인숙의 이런 시가 좋다.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 저 바람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
스커트 자락의 상쾌!(바람부는 날이면 부분, 황인숙)
그래. 시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일은 무의미하기도 한 것.
감옥 속에는 죄인들이 가득하다.
머리통만 커다랗고
몸들이 형편없이 야위었다.
세계를 불태우려고
기회를 엿보는 어릿광대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일생을
감옥에서 보낸다.(전문, 이세룡)
아, 이 시의 제목은 '성냥'이다. 성냥통을 보면서, 그들을 감옥 속으로 환치하고, 세계를 불태우려는 존재들의 어릿광대로 치부하는 상큼한 상상력이란...
계곡마다... 물가마다... 식당, 레스토랑...
굶어죽은 귀신들이 환생해서 저렇게 되었을 것이다
... 아귀들은 몰려들어 아귀아귀 먹는다
... 한 아귀인 나는...
이 천박한 나라를 개탄하고 개탄한다(아귀들 부분, 정현종)
아, 이런 신선한 눈을 가져야 시인이라 부를 만 하다.
까치 주려고 따지 않은 감 하나 있다?
...그러니까 저 감은 도둑이 주인에게 남긴 것이지.
미안해서 차마 따지 못한 감 하나있다!(까치밥 부분, 이희중)
그래. 인간은 만물의 척도는, 쥐뿔~ 물음표와 느낌표가 신선하다.
시들을 골라주느라 고생한 문정희의 '남편' 한 수 읊는다.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도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난 새끼들을 제일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랜덤하우스중앙이라는 중앙일보에서 나온 책이라 얄밉지만,
그런 넘들 속에서 시원스런 시들을 들려주는 문정희가 오히려 이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