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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1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7
쉘 요한손 지음, 원성철 옮김 / 들녘 / 2008년 4월
평점 :
겉표지의 그림만 봐서는 재미난 이야기꾼 주변의 이야기로 보이는데,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린 내게 초록빛 하드 커버는 도대체 어떤 이야기일까??? 쉘 요한슨이라는 스웨덴 작가의 낯선 세계도 몹시 궁금했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귀환으로 시작해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난다.
아버지는 세계의 일곱 바다를 떠돌고 오신 분으로, 큰 궤짝을 가져 오신다.
그 안에선 왕립 교도소의 모포가 나오지만, 뭐, 그분이 감옥엘 다녀 오신들 어떠랴.
그는 꿈을 펼치는 이야기꾼이고, 아이들 동심에 그네를 달아주는 이였다.
그런 꿈같은 생활도 잠시, 그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전형이 되고, 주벽과 폭행으로 가난한 호숫가 마을의 두 남매를 슬프게 한다.
아, 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는 일은 재미나면서도 슬프다.
전화가 처음 가설되었을 때의 설렘이라든지, 신문을 받아볼 정도로 잘 살게 된...
이런 말이 이해가 되는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그 시절의 어두운 면들을 얼마나 무의식이 많이 잘라버린 것인지... 알리라.
방안은 어두웠다. 노란 천으로 만든 갓을 쓴 키 큰 스탠드만 불을 밝히고... 엄마는 빛이 만든 작은 동굴 속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1권, 162)
남의 집 청소를 하러 나가거나 집안일을 하는 때를 빼고, 엄마는 언제나 독서용 안락의자에 앉아 책만 읽었다. 노란 갓을 쓴, 키 큰 스탠드가 꾸며놓은 빛의 고치 속에서 한 마리 누에처럼 웅크린 채 책만 읽었다. 때로는 미소지으며, 때로는 탄식하며 책 속의 이야기를 파고들었다.(1권, 214)
술에 취해 볼썽사납게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남자 곁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책을 읽고 있다. 노란 갓을 쓴 키 큰 스탠드가 자아놓은 빛의 고치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한 마리 누에처럼 앉아 책을 읽고 있다. (2권, 264)
고치 속의 세계에서 책은 이렇게 말한다.
책은 죄짓지 않은 자의 죄책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책은 이야기한다. 누구도 풀려날 수 없는 공포에 대해서. 야생의 공포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거대해지는 공포에 대해서.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미로에 대해서. 죽음을 꿈꾸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위안도 없는 미로에 대해서.(2권, 264)
그들의 오두막에 달린 슈카에서는 이런 노래가 나온다.
살아야 한다. 작디작은 인간들아. 살아야 한다.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아야 한다.
죽음이 너희의 영혼을 거두어 갈 때까지...(2권, 265)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아이의 시점으로 관찰되지만, 그 이야기꾼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진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선,
존경이란 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람한테만 주어지는 것(2권 147)이고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항상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해. 무조건 겸손하게만 행동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멸시를 받는다고. 그게 인지상정이라고.(2권 145)이라고 세대를 거쳐 옮아간다.
신산하기만 한 그들에게 삶이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이 독서 내내 떠나지 않았다.
감옥엘 다녀와서 인텔리 아버지의 삶이 망가지고,
책 속으로 고치를 틀고 앉은 어머니의 삶은 졸아들고,
누이는 정신병원으로 가고... 마치 한국의 6,70년대, 그 이전의 '오발탄'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분단의 슬픔 속에서 어머니는 미쳐서 계속 가자고 하고, 누이는 양공주가 되어 임신을 하고, 동생은 정직하게 살아 봤댔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 속에서 '오발탄'이 되어 갈 곳을 잃어버린 그런 시대 말이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어." 하고, 삶의 부조리를 굳이 애써 부정해 보기도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살았다.(2권, 108)
산다는 건 그런 건 모양이다.
주인공이 중학교 들어가서 문법을 배우는 대목, 한 구절.
주어가 중요해 보인다고 문장의 중앙에 세워두는 게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문장의 중앙은 동사의 자리였다.
'그 행동을 한 사람이 누구인가'하는 문제보다, '그가 어떤 행동을 했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부정의 의미를 지닌 아주 작은 부사 하나로 모든 것을 붕괴시킬 수도 있었다.
언어의 세계는 경이로웠다.(2권, 190)
아, 이 문법 사항이 인생에 적용되는 것이잖는가.
사람이 물론 중요하지만...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행동이 아닌가.
그리고, 작은 부사 하나로... 모든 것은 붕괴된다.
황석영이란 작가, 유명한 사람이다. 누구나 황석영 안다.
그러나... 그가 어떤 행동을 했는가... 무릎팍 도사에 나가서 돈 많이 받았다고?
그런 사건 하나로, 그의 모든 것은 붕괴될 수도 있다.
이야기꾼의 세계는 경이로운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한 구절...
술취한 아버지가 나무라는 장인을 토끼장에 얼굴을 처박고 나서...
할아버지의 토끼 똥이 덕지덕지 묻은 축 늘어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을 때...
크고 노란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온 세상 구석구석을 따스하게 감싸주겠다는 듯.
산다는 건 그런 거라는 이야기꾼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