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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결혼한 지 5년만에 신랑 잃고, 좀있다 아들 잃고, 평생 딸 하나 뿐이던 박경리.
인간성을 탐구하려 했던지, 서로 너무나도 다르던 인간상을 그렸던 김약국의 딸들과,
온갖 인간들의 악다구니가 담겼던 토지...
올해 어린이날 그이는 가볍게 세상을 떴다.
그리고 남긴 유고집 제목이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그 회한들을 여기 버리고 갔다. 그것만 남았다.
어린 시절의 전쟁 이야기, 거기 불신시대에 담긴 아들 이야기는 없다.
아들은 가슴에 묻었을까?
아들 이야기를 쓰려 하면, 억장이 무너져 감당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 그랬을까?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산다는 것, 부분>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옛날의 그 집, 부분>
그가 아름답자고 하고, 홀가분하다고 한 그 행간에 배인 눈물과 바느질 자국이 내 눈엔 자꾸 밟힌다.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바느질, 부분>
그의 글들은 그의 한숨과 눈물과 젊음의 아름다움 모두를 한땀 한땀 새긴 것이었을까?
시인들이 너무 많다
머리띠 두른 운동가도 너무 많다
거룩하게 설교하는 성직자도 너무 많다
편리를 추구하는 발명가도 많고...
많은 것을 예로 들자면 / 끝도 한도 없는 시절이지만
그중에서도 /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 / 확고부동하게 옳다고 우기는 사람 참 많다 <확신, 부분>
큰 강물 지난 고인의 눈으로 보기에 가짜 대머리 두드리는 마빡이나,
옳다고 머리띠 질끈 동여맨 이들이나...
다들 가엾게 보인 모양이다.
그렇게 세상에 얽혀 살지 못하고,
그렇다고 실팍한 농부의 아낙네 되지도 못하고,
글발로 인생을 누벼온 지난 날을 가벼이 소지 올리듯 남긴 글들이 아름답다.
다시 태어나면 / 일 잘 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일 잘하는 사내, 부분>
마지막 사진 부분에 박경리가 여고 시절에 그린 그림 옆의 興田片子란 창씨개명한 이름이 시대의 아픔을 눈에 밟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