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꿈에 창비시선 244
최민 지음 / 창비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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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한낮에 고시원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는 것이 너무도 혐오스럽고,
길을 보여주지 않을 때, 마지막 행동은 그렇게 무서울 수 있는 것이다.

저 뚫린 구멍은
밖으로 나가는 문이 아니다
어두운 벽 복판에 비친
환각일 뿐

발목이 걸려 넘어지는 큰 마당을 지나
아찔하게 높은 기둥 위
말 대가리를 보고
처음 공포를 느낀다

커다랗게 소리내며 말 이빨들이 웃는다
내가 원한 것은
쾌락의 하천이 아니라
자유(테러, 전문)

그 범인의 영혼은 어떠했을까...
왜 그토록 무자비한 방화, 살인의 장본인이 되었을까...
큰 사건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그저 좁은 고시원에서 고생하며 오늘 살면 내일 좀 나으리라는 가엾은 사람들을 향한 분노도 아니면서,
그저 고시원에 불지르고 아주머니들을 살상할 수밖에 없는 주제에...
이왕이면 여의도나 청와대라도 가서 나좀 살려달라고 소리지르고 죽지 못하고... 얄팍한 영혼이...

짧은 내 인생이 정말 얄팍하고 보잘것없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별수가 없으니 그냥 가던 대로 나아갈 뿐, 지금 내가 지나는 곳이 사막이라면 이제 사막의 끝을 보아야 하는데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음을 사막에 탓할 수 없듯, 내 인생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해도 그 마감이 보이지 않는데 그것을 보자고 마음을 재촉할 수는 없는 일

천박함, 내 인생의 천박함
희망이 있는 것들은 제각기 배를 타고 떠난다 나는 희망이 없었기에 그저 떠나는 배들을 배웅할 따름(쪽지, 전문)

혹시, 아픈 가족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삶이,
사는 게 아니고,
매 순간 숨쉬는 일이
절망이 되어버릴,
이 땅에서
희망이 있는 것들은 제각금 배를 타고 떠나는 이 터에서...

피아노 곡을 듣다가 /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마음
너는 아직 / 깨어나지 않고 / 노란 작은 새가 유리창가에서 노는 / 봄날(아픔, 전문)

병약한 아내와 딸이 / 웃는 얼굴로 / 밤하늘 별자리에 높이 / 떠 있다
두 팔로 / 껴안아 / 내리고 싶지만 그냥 / 바라본다(큰 별자리, 전문)

최민의 시를 읽으면서 괜스레 세상이 슬퍼진다.
전혀 다른 상황에서 쓴 시라도, 읽는 이의 마음에 따라 텍스트는 변화하는 것이다.

아, 가을이다.
더운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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