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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앤드류 솔로몬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울증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활력이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삶은 슬플 때조차도 생기에 차있다.(652)
여름이었을 것이다.
뙤약볕에 세워둔 자동차 안에서 한창 달구어진 '한낮의 우울'을 촉감으로 뜨겁게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알라딘의 어느 분이 한낮의 우울에 서평을 다신 걸 보고, 도서관에서 빌려다가 차에 뒀더니 후끈 달궈졌던 모양이다.
잘근잘근 손톱을 씹듯이 오래 읽었다.
이 책을 읽는 일은 정말 손톱을 씹는 일 같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 같은 건 가져본 일이 없지만, 왠지 이 책을 읽으면서는 물어뜯지 않는 손톱이 근질거렸다.
이 책을 읽는 도중에 탤런트 안재환과 최진실이 죽었다.
안재환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아직도 설이 분분하지만, 최진실의 사인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었다. 우울증은 사람을 그렇게 외진 곳으로 몰아넣는 무서운 병이지만, 그 이름에도 '병'이 아니라 '증'이 들어 있다.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 증세처럼 본 이름인데, 그것이 더 무섭다.
동양에서는 체질을 음양과 태소의 4상으로 나누지만, 서양의 체질에선 점액질, 담즙질, 우울질...등으로 나눈다. 우울질... 이것이 하나의 체질일 수도 있는 모양이다. 나도 체질적으로는 우울질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우울증 환자가 아니면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는 공감 너머 감수성의 바다를 헤엄치곤 했으니 말이다.
우울증의 최고 치료제는 믿음(206)이라는 저자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이다.
세상에 나를 믿어주는 사람 하나라도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면, 사람은 자살하지 않는다는 말이 거기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누구나 갖게 쉽지만, 우울증에게 믿음의 상실은 자살로 가는 이정표인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반응이란 걸 할수 없는,
소요의 한 가운데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태풍의 눈처럼,
정지한 기분, 텅 빈 기분.(101)
두꺼운 투명 아크릴 문진에 영원히 갇힌 나비가 된 기분이라면, 죽음은 그 나비의 우화를 돕는 행위 예술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울증은 자아를 붕괴시켜 광기에 이르는 건널목으로 환자를 안내한다.(75)
고난이 표준인 세계에서는 인생의 힘겨움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우울증의 경계가 고정적일 수 없다.(319)
한국 여성들에게 판정내려진 '화병'이 곧 우울증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우울증은 선진 사회의 유한 계급의 병이라는 말도 있다시피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사치를 누리는 계급에만 적용된다.(319)는 말을 저자는 이누이트족과 연계시켜 하고 있는데, 한국 여성들의 생존 본능이 힘겹던 시절에는 소설 속의 인물로 등장하곤 했지만, 먹고살 만해진 현대에 와서 화병이란 객관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게 된 걸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역경을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역경을 통해 교훈을 얻고 싶어하지 않는다.
고난은 유쾌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646)
먹고살 만해 지면서 삶의 지향점이 더 높아질 수 있다.
그렇지만, 행복이란 가진 것과 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우울증이란, 활력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지 못할 때, 문득 찾아드는 손님이리라.
밤의 공포가 아니라, 한낮에도 무료한 삶에서 지쳐갈 때,
표지에서 고야의 거인이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하지도 않으면서
고개를 돌리는 것처럼...
우울증이란 판도라의 상자에 갇힌 단 하나의 희망은 곧 '활력'일 것이다.
현대인들이 삶에 찌들려서 우울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활력을 잃게 될 때, 우울증은 치밀하게 가슴으로 달려든다는 이야기에 진하게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