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규석의 만화다.
자기 가족들을 인터뷰한 뒤,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꼭지들을 그린 책이다.

대한민국에서 살고있다는 것은...
지독한 과거를 잊어버린 체 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고,
그 과거보다 더 지독한 현실에서 고개를 돌리며 살고 있다는 것이고,
빛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애써 눈감으며 살고 있다는 것임을 그는 애써 보여주려 한다.

불과 30년 전, 한국의 초등학교 교실에선 '도시락 검사'가 행해졌다.
쌀밥만 싸온 아이는 선생님한테 혼나기 일쑤였는데, 보리밥을 싸올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서 그 아이들은 보리쌀을 빌려다가 쌀밥 위에 박기도 했다. 선생님은 모른체 넘어갔다.
그리고 한 열댓 명의 아이들을 졸졸 꽁무니에 달고 선생님은 가정방문이란 걸 다녔다.
이층 양옥에 사는 아이의 집에 가면 제법 오래 머물었고,
우리가 마당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집에서는 금세 나오곤 했다.

이 당시의 아버지, 어머니, 이웃 사람들, 우리 형제들에 대한 기억은...
애써 잊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내 기억에서도 까마득히 멀다.
가뭇없이 사라져가 버린,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그 사람들을 최규석은 '원주민'이란 적실한 말로 표현한다.

어메리컨 원주민은 각기 다른 '언어'와 '풍습'을 가진 종족이었지만, '인디언'이란 한마디로 통폐합되면서 잊혀져갔다. 어디에나 있던 원주민은 어디에도 없는 존재, 아니 존재의 부정을 겪고 말았다.

한국의 전통, 도 그렇게 단절되어 갔다.
전통적인 농촌의 짚풀 문화를 이어오던 사람들은,
60년대 산업화 도시화의 바람 속에서, 짚검불 날리듯 허무하게 삶의 뿌리를 날려버리고,
가난한 사랑 노래 읊조리며 슬피 고개 숙이는 도시인이 되고 말았다.
대가족 제도는 세계 1위의 출산율 저하국으로 발전(?)하였다.
아직도 코리아하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작은 나라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열 개 넘게 따는 겉보기 등급은 제법 높은 사회임을 자랑한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 안에는 세계 10위를 자랑하는 국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니 영원히 따라갈 수 없는 '원주민들'이 가득하다.

그 원주민들은 어디나 가득한데도...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주말 연속극에는 늘 전문직 여성이 나오고, 재벌들의 사랑 놀음이 등장한다.
밥은 먹고 살지만... 아직 세계 10위의 '풍요로움'은 당신들의 천국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행복은...
가난하다고 적은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행복이 저절로 키를 낮추어 찾아든다.
부유한 이들에게 행복은 키높이 구두를 신고 비죽이 고개를 들이밀어, 로또의 장대 높이뛰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

최규석의 원주민 들여다보기는, 자기 가족의 미세사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리얼리즘'의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이데올로기를 '거시적'으로 들여다보는,
그래서 전형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만화에 비하여
'미시적인 삶'을 그대로 '리얼'하고 드러내 보여주는
이런 만화들이 심금을 징~~~~~~허게 울린다.

그의 만화를 보면서 금발의 미녀가 표지에 찍힌 레코드 판 표지도 떠올랐고,
가난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했던, 부모님과 누나, 나의 옛날도 떠올랐다.
책상도 하나 없이 재봉틀 위에서 공부하면서도 '밥상'에서 공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좀더' 행복했던 나의 키낮았던 어린 시절이...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전형적인 농촌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지닌 60대들에 비하자면,
도시의 골목길에서 전쟁 놀이를 하고, 술래잡기, 학교 놀이를 하며 딱지치기를 하고, 골목길을 돌아돌아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외등도 없던 컴컴한 소년기를 지닌 40대들은 추억의 노스탤지어가 더 적을지도 모르겠다.

아, 어쩌면, 방학인데도 학원에서 학원으로 뺑뺑이를 쳐야하는 요즘의 초등학생들은, 어른이 되고 노년을 맞아도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란 애초에 '노란 봉고차' 외엔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몹쓸 사회에 우리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원주민들의 언어도, 삶의 지혜도 모두 잊어버린 채...
노란 봉고차를 서너 번 갈아타며 하루를 잊어가는 어린 '센'들과,
마을버스와 지하철과 시내버스가 환승이 되어 다행이라며 쳇바퀴 도는 어른 '센'들과,
연금도 박탈당하고, 사회적 시스템도 불안하여 인간 장수 100세의 미래가 마냥 두려운 노인 '센'들로 가득한 무미건조하고 몰개성한 '가오나시(얼굴없음)'의 울렁증 가득한 세상에서 원주민들은 표류하고 있는 것일까?

원주민들이 논밭에서 보여주었던 푸근한 인정과 때되면 씨뿌리고 때되면 거두어들이던 공동체 사회의 미풍양속을 '치히로'에게 '절대 네 이름을 잊어서는 안 돼.'하고 속삭여주던 하쿠처럼, 우리에게 되돌려줄 동화 속 주인공은 없는 것일까?

세계화의 파도가 신자유주의의 해류를 타고 원주민들에게 밀어닥칠 때,
이미 잊어버린 것도 많은 원주민들은, 이제 잊어버릴 것도 없는 하루하루를 팍팍하게 살고 있을 뿐이란 생각으로 아득한데, 최규석의 만화는 그 잊혀진 '향수'에 '대한민국 원주민'이란 오마주를 되살려 내어 그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오마주 [hommage][명사]<연영> 영화에서, 다른 작가나 감독의 업적과 재능에 대한 경의를 담아서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모방하는 일. 표절 [剽竊][명사]시나 글, 노래 따위를 지을 때에 남의 작품의 일부를 몰래 따다 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