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 걸어라 - 산티아고 가는 길
조이스 럽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조이스 럽 수녀님의 '느긋하게 걸어라'는 여느 여행가들의 기행문과는 품격이 다른 책이다.

카미노의 경험을 재미삼아, 사진과 함께 힘겨움을 적어내는 일반인들의 책에 비하자면,
역시 평생을 영성과 대화를 하며 살아오신 수녀님의 내공이 팍팍 느껴지는 훌륭한 책이다.

그런 수녀님이 책을 낼 생각도 하지 않고 계셨다는 일은, 지금 생각하면 위험 천만한 생각이셨다. ^^ 이 좋은 책을 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이 책에 귀 기울이다보니 어느새 나도 행복한 순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추천사를 읽으면서 수녀님의 투병 소식을 들었다. 이해인 수녀님의 회복을 간절히 빌었다.

순례자여, 당신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길이다. 당신의 발걸음, 그것이 카미노다.(44)... 그래. 우리의 삶이 곧 역사이고 길이다. 하루라도 잘 살아야 할 일이다.

카미노를 준비하면서 나는 삶의 매사에 있어 끝없는 준비의 유익과 보상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배웠다. 책을 쓸 때 마감일을 지키느라 쩔쩔매년서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즐거움을 잊고, 자식을 키우고 훈육하는 동안 아이들의 아름다움과 아이들로 인한 기쁨을 놓칠 수 있다는...(53)

왜 우리는 다음 대피소까지 급히 서두르고 있는 것일까? 좀처럼 충분히 쉴 시간을 갖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속 더 빨리 가야한단, 당일의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야 한다는, 스스로 부과한 이 부담감의 근원은 무엇일까?(58)... 결국, 느긋하게 걸어라.

무엇이든 귀한 것일수록 움켜쥐지 말고 그것을 든 손을 감사함으로 펴라. 그럴 때 삶은 훨씬 순탄해진다. (78)... 이런 걸 깨닫지 못하면서 길을 하염없이 걷는 어리석음이란... 왜 걷는지...

내가 힘든 상황에 치중하여 생각과 감정을 거기에 빼앗기면, 그 저항심이 다른 좋은 것을 방해하고 압도하여 결국 그것을 쉽게 놓치게 된다. 어려운 점을 인정하되 거기에 지나치게 집착하도록 자신을 내어주지 말라. (139)

순례자는 겉모습은 '노숙자와 비슷'하다. 카미노를 걷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빈민들에 대한 나의 의식도 깊어졌다. (157)

카미노는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나의 마음을 더 활짝 열어 주었다. 내게 있는 생활 필수품을 그들도 누릴 권리가 있음을 나는 늘 앚지 않고 싶다.(164)

오푸스 데이...는 로마 전통 진영과 얽혀있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부유한 천주교 단체인데...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보수주의자냐 자유주의자냐는 중요하지 않음을 배운다.(168) 판단하지 말 것. 그들의 친절이 가르쳐 준 것은, 신학 같은 것에 대해 어쩌다 다른 입장을 갖게 되었을 뿐, 우리 모두가 인간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

서로 몹시 다른 순례자들... 그들을 그냥 두자. 각자의 관점대로 살도록 두자. 저마다의 방식대로 카미노를 걷도록 두자. 내 마음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생각은 단지 나 자신의 자아가 나오는 것.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길에 다른 사람들이 맞추어 주기를 바라는 것.(173)

판단해서는 안 된다. 모든 순례자는 하나의 이야기이므로...(177)

건방지고 오버하는 남들을 보고 타산지석을 배운다. 나의 태도와 기대 또한 남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지 돌아보라는 일깨움을...(202)

수녀님과 함께 길을 걷는 동반자 톰은 목사이다. 그들은 수시로 대화를 통해 배운다. 톰이 <프리메로 디오스, 하나님을 첫 자리에>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그들은 신뢰로 함께 한다.

여행자는 짐을 가볍게 해야 한다.
우리 각자가 매번 구매 욕구를 물리칠 때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캐럴 크라이스트.(270)

카미노를 걸은 분들의 책들을 놓으면서 늘 아쉬웠던 것이 이런 것이었다. 지명과 길의 험난함, 다음에 올 사람에게 주는 팁 외에도, 또는 친구들과의 즐거웠던 추억이나 쓰라린 경험들보다는, 영적으로 충만한 여행길이었음을 보여주는, 그리고 충분한 준비와 동반자와의 교류를 통하여 많은 고통을 줄여 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책이 필요했음을 늘 생각했던 모양이다.

언제 시간이 좀 나면, 다시 느긋하게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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