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옥편 - 한문학자의 옛글 읽기, 세상 읽기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스승과 선생님, 교사, 교원... 가리키는 대상은 별반 다르지 않지만, 담고 있는 뜻은 확연하게 다르다.

과연 나에게 스승은 있었던가. 그리고 마음 속에 스승으로 모시고 있어야 할 인간상, 또는 학문의 길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날마다 세상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바뀐다. 10년 전에 전혀 꿈도꾸지 못했던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지구 반대편까지 편지를 보내는 데도 몇 초면 되고, 온갖 사진이나 동영상을 가지고 다니는 휴대폰으로 촬영해서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 올려서 공유할 수도 있다. 서울에서 밤새 일어나는 집회를 컴퓨터로 구경하면서 참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지고 가야할 삶의 본질은 얼마나 변한 것일까?

사람을 도구로 여겨서 비정규직으로 잠시 쓰다가 불리하면 버리는 세태.
이런 세상을 바라보는 정민 선생님의 마음은 쓰디 쓰다.
돌아가신 스승의 옥편을 바라보면서, 찾고 또 찾아 닳고 닳은 면모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지지난 주, 상경 투쟁의 버스 안에서 이 책을 거의 읽었더랬다. 내려올 때는 곯아떨어졌다가 오늘 잠시 마무리를 지었다.

책에서 기억에 남는 말 중에 '덕위상제 德威相濟'가 있다. 덕과 위엄이 서로 건진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데, 덕이 있어야 하지만, 위엄도 있어야 한다. 어느 한 편이 치우쳐서도 안 되고, 서로 가지런히 구제해 주어야 한다. 위엄에 치우치려할 때 덕이 건져 주고, 덕의 자비만으로 버르장머리가 없어지려 할 때, 위엄이 구제해 주어야 한다. 지금 이 나라의 대통령이란 자는 덕도 위엄도 없다. 초등학생조차도 쥐새끼라고 속되게 부른다. 참요처럼 쥐새끼가 나라 망친다고 한단다. 안타까운 일이다.

조봉암 선생의 무덤앞에 이런 구절이 있단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돈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요,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아니하여서는 안될 일이기에 목숨을 바쳐 싸웠지 아니하냐."
필요할 때, 책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고맙다.

좋은 책은 정보를 다루지 않고 정보를 다루는 방법을 다룬다. 알려주는 대신 일깨워 준다. 그래서 책을 제대로 읽으면 중심이 딱 잡힌다.
눈빛이 깊어지고, 마음 속에 샘물처럼 차오르는 것이 있다.
책의 한 대목 앞에서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고, 감전된 것처럼 전율을 느낀다.
그 책을 읽기 전의 나는 읽은 후의 나와 완전히 다르다.(203)

지금의 독서는 단순한 지식과 정보만 취급한다.(215) 지식이 식견이 되고, 식견이 지혜가 되는 독서라야 하는데, 오늘날은 지식은 정보로만 끝날 뿐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정보를 요리하는 힘이 필요하지 않고, 정보를 가공하고 편집하는 기술만 있어서는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현란한 수사, 문체의 과잉은 고질이 된 지 오래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알고 나면 더 허탈해지는 미문의 홍수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몽롱한 수사로 글쓴이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는 횡설수설의 글이 많다. (256)

옛 문장론에서 김매순의 말은 날카롭다. 글을 짓는 체가 셋이 있다. 첫째는 간결함, 둘째는 참됨, 셋째는 바름이다. (265) 할 말만 하는 간결, 이것과 저것을 가늠하는 참됨,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바름, 이 세 가지가 글쓰기의 바탕이 되는 마음가짐이다.

마음이 날마다 바람에 어수선하게 흩날리는 뜨거운 아스팔트의 여름.
서늘한 목물같은 글들은 새로울 것 없고, 매캐한 책먼지가 코를 간질일 것 같은 글들이지만, 정민 선생의 일관된 가르침이 내 정신을 올곧게 세우고 게으름을 재촉한다.
선비의 마음을 알고 싶은 이거나, 배우고 싶은 이, 또는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부산은 시청으로 나갈 시간이다. 한 송이 촛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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