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2007년 6월 8일부터 2007년 7월 27일까지 8회에 걸쳐 진행한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강의를 정리한 것이다. 이 강의의 기본 목적은 인문학 고전이 어떤 시대에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것은 인간의 현실적인 삶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 그러한 고전은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하며 그것들끼리는 또한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특히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는 고전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정치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서문 통합적 인문학 공부로서의 고전읽기와 글쓰기' 중에서)

이렇게 적어 놓으면, 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 것이다. ㅠㅜ

지난 주, 단기 방학을 이용하여 아들과 둘이서 서울 여행을 했다.
소위 명문대라는 세 학교의 캠퍼스를 둘러보고, 서울의 고궁을 두어 군데 구경했는데...
서울대 캠퍼스에서 '레포트 쓰는 법 강의'하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처음엔, 뭐, 저런 걸 다 강의를 해? 했지만,
곧 내가 대학 시절 레포트 쓰는 데 얼마나 문외한이었으며,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글을 적어 내곤 했던지를 생각해 보면,
꼭 필요한 강의란 생각이 들다가도,
기실 강의를 듣는다고 좋은 레포트를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유원의 이 책도 마찬가지다.
강유원은 왜 정치사상 고전을 읽어야 하며, 그 읽기는 어때야 하는지를 정말 잘 이야기하고 있다.
문제는... 교양을 가지려는 사람도 적고, 그러므로 올바른 읽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도 그만큼 적은 것이 한국 사회의 함정이 아닐까 하는 내 생각이거나, 위험하게도 한국 사회가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큰 격변이 일어났고 우리는 폐허 가운데 서 있다. 우리는 자그마한 보금자리를 새로 짓고 자그마한 희망을 새로 품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좀 어려운 일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순탄한 길이 이제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장애물을 돌아가든지 기어 넘어가든지 한다. 아무리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글은 청계천에서 이메가를 탄핵하자는 결의문으로 적절하고, 미친소 수입의 비극에 좌절하는 호소문으로 비치겠지만, 1차대전 시기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서두란다.

정치는 이렇게 인간 삶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정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로크의 <통치론>을 읽어내는 방법을 짚어주기도 하지만,
이런 것들을 읽으면서 핵심을 짚는 소논문이나 레포트를 적어 내려면 어떻게 짱구를 굴려야 하는지도 잘 가르쳐 준다.

요약하기, 보고서나 소논문 쓰기 등을 과제로 내는 교수들이 읽어내는 석사과정, 박사과정 학생들의 글들이 얼마나 한심한지는 내가 많이 써 봐서 잘 안다. ㅠㅜ

솔직히 말하자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에는 끄덕이기도 했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주워 섬겼던 낱말 몇 개 외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치매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강유원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희열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그는 정말 <짜깁기>를 하진 않는다는 것. 그래서, 짜깁기 하지 않고 논문 쓰는 법을 그에게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소논문의 주제는 (1) 범위를 좁게 잡고,
(2) 자신이 쓴 글의 목차를 짠 다음에 참고문헌을 찾고,
(3) 참고문헌을 읽을 때는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고,
(4) 글을 쓸 때는 메시지 강박증에 빠지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것만 서술해야 한다.
는 그의 설명은 글을 못써서 헤매기만 하다 석사까지 부끄러이 마친 나같은 사람에게 주는 큰 가르침이다.

마키아벨리 이야기를 하다가, 아담 스미스, 찰스 다윈을 묶어 이야기하는 대목은 날카로우면서도 시니컬하다.
필요하다면 부도덕하게 행동하는 것이 낫다.(마 씨)
네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모두 잘 되게 해준다.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펼쳐 보여라.(아 씨)
상황에 가장 잘 적응해서 살아 남는자가 강하다.(찰 씨)
도덕적인 경계는 무너지고, 마음껏 욕구해도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해 주며,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니까 못 살아남은 자를 동정할 필요 없다. 이게 서양 근대의 핵심 이론... 이라는데...(143)

한미 FTA나 미친소 파동의 핵심 내용도 알고 보면 이런 거 아니던가.
이메가의 교육 자율화에 부르르 떠는 청소년들과 운하 삽질하기, 의보 민영화 같은 되도 않은 정책들이 '사실은 되지도 않아야 하는데, 마구 될 것 같은 불안감으로 촛불을 들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고전을 읽으면서 부르르 떨게 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두려움에...

로크를 이야기하면서 '당파성' 이야기를 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잘 내세우는 그 당파성 말이다.
'민족'이란 말로 당파간의 이해 관계를 감추고,
'국익'이란 되도 않는 말을 써먹음으로써 당파성의 표출을 감춘다.
당파성이 드러나려는 곳에는 백골단, 구사대, 구국의 결단이 판을 치고 방패가 춤을 춘다.

28년 전 광주는 오늘도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강유원 교수의 강의가 제법 괜찮은 것은, 마지막에서 그가 권하는 책들의 목록에 있다.
책을 다양하게 읽어보고 비교해보지 않고서는 어느 출판사의 누가 번역한 책들을 읽으라고 말해줄 수 없다.
쓰레기 같은 교수들은 쓰레기 같이 못 쓴 제 책 팔아먹기 바쁜 놈들이기 때문이다.

아, 우리 부모님이 돈만 좀 많았으면... 강유원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빨래라도 해 주면서 평생 배우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내일부터 로또를 사야할까보다.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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