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すぎ-さ·る [ぎ去る] (시간이) 지나다. 과거가 되다. 

원 제목이 '스기사라나이 히토비토'...니깐, 과거가 되지 않는 사람들... 지나칠 수 없는 사람들... 같은 뜻이겠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란 제목이 왠지 내용을 적실하게 담보할 수 없단 생각을 읽는 내내 했다. 그래서 부제를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이라고 붙여 두었을 것이지만... 그래도 못내 제목이 주는 '포스'가 원제에 비해 약해 아쉽다.

이 책의 표지에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실려 있다. 척 보고 알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맨 첨의 김구 선생 정도다. 자세히 봐도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은 안네 프랑크 정도일 뿐.

그런데 이 구도와 똑 같은 사진들이 '파이'를 이루어 있는 책이 있다. 바로 중,고등학교 도덕 교과서이다. 극우파의 우편향적인 보수성을 고리타분하게 가득 담은 국수주의적 표본의 교과서. 

도덕 교과서의 사진들과 이 책의 사진들을 비교해 보다가 깜짝 놀랐다.
도덕 교과서의 사진들에서 보이는 인물들은 초등학교 시절, '위인전집'에서 배웠던 그 인물들이었다. 세종대왕, 나폴레옹, 예수,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이순신, 원효, 간디... 위인전에서는 숱하게 많은 장군들과 부자들(록 펠러, 강철왕 카네기 같은...)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서경식의 이 책에 수록된 20세기의 인물들의 면면을 본다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만들어낸 도덕 교과서에 수록될 만한 사람은 김구와 안중근 정도일까? 그렇지만... 이 책이 만약, 만약에... 30년 전에 한국에서 읽혔더라면... 하는 상상을 해 봤다. 파블로 네루다와 살바도르 아옌데... 체 게바라와 프란츠 파농, 그리고 아직도 안갯속에 묻힌 이극로와 김사량 같은 납북된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내가 대학 시절 단편적으로 만나지 않고 이런 책으로 만났더라면...

그리고 각각의 짧은 평전 말미에 붙어있는 참고 도서를 부지런히 찾아 읽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사람을 보는 눈이 이렇게 다르다. 제 한몸 분신하여 세상을 일깨우는 횃불이 되려던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37년 전 내일인데, 아직도 분신하는 이들을 욕되게 하는 세상은 밝아지지 않았다. 패리스 힐튼처럼 돈으로 온몸을 치장하는 사람들이 와서 시시덕거리고, 가수도 없는 나라에서 비욘세라는 외국 가수가 와서 공연을 펼치곤 하는 세상에서... 그들에 환호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지만, 90%의 서민들의 생활이 팍팍해지는 세상 돌아가는 게 허무해서 시청앞에 모여든 이들더러 '차 막힌다'고 불평하는 시선들을 가진 세상...

서경식이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그가 바라본 '위인'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디아스포라의 슬픔, 그리하여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펄럭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들의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나부끼는 곳에서는 왠지 슬프지만은 않은, 슬픔으로 슬픔을 이겨내고 죽음으로써 죽음을 극복하는, 승화의 경지를 만날 수도 있음이 이 책의 가치일 것이다.

재일조선인이란 디아스포라의 시선은, 
두 형이 극복하려던 노스탤지어의 한계가 끝이 보이지 않던 감옥살이로 아스라하게 사라지자, 
조국이란 혐오스런 짐승이 갈기갈기 존재를 발겨버리려는 처지를 바라본다.
도덕 책에 실린 위인들과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이들의 차이...
그 차이가 바로 제목에서 이야기한 <지나쳐버려선 안 되는>, <과거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도덕 책에 실린, 그리고 우리가 위인전에서 숱하게 읽었던 이야기들은 <문명>의 편에 선 자들의 이야기였기때문에 굳이 <기억>하려고 할 필요가 없는 이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49명의 삶은 아스라한 향기만을 남긴 삶들이다. 그들은 <야만>이 저지른 횡포에 묻혀져가기 십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스기사라나이...>해야하는 차이를 강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 않으면 <지나쳐 버리고 마는> <한낱 과거로 치부되고 마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민족이기도 하고, 자유이기도 하며, 투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로운 정신이 가진 것은 <어린 아이의 순진 무구함>이 깃들인 <노스탤지어>의 동경, 향수... 그런 것들로 보인다.
권력을 쟁취했거나 '성인'으로 추앙받거나 '거부'가 되어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이들이 남긴 말들은 <어른들의 지당한 말씀>으로 그 말씀을 배우는 이들은 '네, 그렇습니다.'하고 따르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서경식의 탐구의 한계가 유럽, 남미, 동아시아...에 머무른 느낌이 강하다.
그의 탐구가 <잊혀져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한발짝씩 옮길 때,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은 더 힘을 얻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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