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공미술인가 - 미술, 살 만한 세상을 꿈꾸다, 학고재신서 40
박삼철 지음 / 학고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누구에게 권해주고 싶으냐면...
일단은 미술하는 사람에게 권해줘야 할거고,
그 다음은 건축이나 설계 등 도시 공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권해주고 싶고,
또 인문학이나 공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거시적인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듯 싶다.
사회학적으로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이다.

미술은 개인적인 것이었다. 저자는 그걸 소승, 즉 개인이 타는 수레로 여긴다.
자기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예술이 미술이라 보던 것.
이제는 미술은 더이상 개인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을 대승, 곧 연대를 찾는 큰 수레에서 공공미술을 찾는다. 내면적이고 초월적인 소승에서 순수미술의 수신을 보고, 참여하고 연대하는 대승에서 공공미술의 처신을 본단다... 참 멋지게도 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공공미술은 의미를 찾을 게 아니라 '사용'을 찾아야 한단다.
그 공간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뭔가 사용할 수 있게 해야 공공미술이란 것.
그 사용은 꼭 의자처럼 앉는 게 아니더라도, 연대의 공감을 또는 환경 문제처럼 문제 의식을 공감하게 만드는 사용의 확대된 외연을 뜻한다.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과학 기술이 디스토피아의 파괴된 현실을 직면하게 할 때, 미술은 다시 거리로 나온다.
그렇지만, '불신 지옥'의 압력처럼 공공미술은 보는 이를 압도하고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미술?인지도 불분명한 거대한 돌덩이, 쇳덩이들은 관객을 무시하고 때로는 억압해 왔다고 본다.

이제는 모든 축제조차도 삶의 숨구멍, 탈출구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장소 마케팅, 관광 산업'의 물신 숭배의 장이 되어버린 현실... 여기서 공공 미술은 사용자를 위하여 축제의 장을 마련하여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살이'가 밀려나고 '벌이'가 지배적인 구도의 사회에서 생태, 다양성, 건강성을 추구하는 예술의 지향점...

문화를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창작 지원은, 요령있고 인기있는 소수의 엘리트 미술가와 전략가만 살리고 그들이 문화 예술의 전부인 것 같은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289)는 비판은 최근 신모씨를 둘러싼 권력형 비호 비리 사건이 공공 미술의 사용자를 어떻게 소외시키는지를 설명해주는 구절이다.

공간은 '채움'의 건축물들,
'비움'의 광장, 또는 공원,
이들을 '연결'하는 길들로 이뤄진다고 한다.
채움도 아름답게, 비움도 넉넉하게, 연결도 매끄럽게 하는 것이 공공을 위한 건축이고 예술가의 마음일진댄, 성냥곽을 채우듯 아파트를 쑤셔박고, 비움은 최소화하고, 연결은 중구난방으로 뚫었다 막았다하는 정책으론 거기 사는 사람을 소외시키는 역할밖에 못할 것이다.

얼마 전 시민도서관에 출장갔던 길에 돌아오다가 하야리야 부대 터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 터를 공원으로 썼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운 맘 가득했다. 하긴 그 땅 밑엔 온통 오염물질로 가득하다 하니 공원으로 한들 건강에 도움되는 구석도 없을 듯 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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