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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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이 뇌쇄적이다. 아주 죽인다는 뜻이다.
치즈와 구더기. 치즈에서 구더기가 꼬이듯이... 하나님의 세계로 정의된 질서를 비웃는 듯한 제목이 글의 내용을 상당한 상징으로 함축하고 있다. 결국 천사나 인간의 존재를 구더기처럼 지저분하게 구물거리는 물적 존재로 파악한 개인은 전통적 종교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불순분자'로 처단되게 마련이었다.

요즘 허생전을 가르치고 있다.
조선 시대, 그것도 병자호란이 지난 시기, 청나라라는 세계적 제국의 현실을 부정하고 오로지 명나라라는 명분에 얽매이다 조선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김훈은 '남한산성'에서 명분에 얽매인 양반 관료들의 모습과 현실에 눈뜬 민중들의 모습을 어슴푸레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또렷한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진 못하다. 전형적인 민중의 모습을 지닌 등장 인물이 안타까웠다.
박지원의 허생전은 당시 발설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만약 조선 시대, 그 북벌론이 승하던 시기에(힘도 없는 것들이 용심만 남은 북벌론) 청나라와 적극적인 교류를 펼쳐야 한다는 허생전을 양반들이 읽었다면, 그도 역시 모가지가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역사 책에서는 거짓말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정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살아 숨쉬고 있었는지는 읽을 수 없다.
그저, 권력을 잡은 자들 중심으로 모든 정치, 문화, 사회, 예술, 경제의 흐름 등을 엉성하게 얽을 따름이다.
소설 속에선 사람이 살아 숨쉰다.
조정래가 태백 산맥에서 숱한 민중들에게 '죽산댁, 외서댁, 소화, 염상진, 염상구...'등과 같은 이름을 부여하여 그 역사를 살아 꿈틀거리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허생전의 허생도 조선의 허술한 경제적 유통 구조, 명분만에 매여 당쟁을 일삼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 등을 살아있는 목소리로 보여주고 있다.

카를로 진즈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는 '미시사'에서 유명한 작품이란다.
역사 전공은 아니라서 그의 책이 얼마나 큰 상징을 띠고 인용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역사 탐구는 역사 복원에 큰 밑바탕이 될 것 같다.
이 책에서 주인공 메노키오는 방앗간 주인으로 종교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당시 민중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그런데, 미시사란 것이 한 사람의 역사를 복원하는 상세한 과정이다 보니, 마치 메노키오란 주인공을 둘러싼 소설처럼 읽을 수 있다.
마치 김성한의 '바비도'를 읽는 기분이다. 6차 교육과정 고교 교과서에 '바비도'란 소설이 실렸다가, 특정 종교의 반발로 다음 해 삭제된 일이 있었다. 남의 나라 종교가 이 땅에 들어와 부리는 기승이란... 그저 웃어 넘기기엔 지나치단 느낌이 많이 든다.

메노키오는 법정에서 '라틴어와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탄압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제 생각에 라틴어로 말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신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소송때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지 몰라 좌절하기 때문"이라고'(84) 기술한다.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 법전을 읽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모든 사람은 성령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 제의는 '인간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으며, 장사에 불과하다.(86) "여러분은 사제와 수사에게 가느니 나무에게 고백하러 가는 게 낫다."는 말은 지금 교회나 그 때의 교회나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지배적이고 착취적인 입장에 섰던 것인지를 보여준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계신 위대한 주님에게 고백하고 자신의 죄 사함을 간청하는 일"이라고 하여 종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형식적이고 고압적으로 변질된 종교의 개혁을 암시한다.

재판은 그가 도대체 어디서 이런 불량스럽고 이단적인 생각을 주워들었는지를 심문하지만, "저는 결코 이단자와 교류한 적이 없"으며 "생각할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보다 숭고하고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원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의 지식은 '몇 권만의 책을 우연한 기회에" 읽었을 따름이라고 한다. (168) 사실 인간이 세상을 파악하는 방식은 책을 읽고 눈이 뒤집혀서 그리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독재 하에서 눈을 뜬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이나 한완상 교수의 '민중과 지식인'에 노출되어 그리 된 것이 아니었다. 도도하게 흐르는 하부 문화의 저류가 인간을 눈뜨게 만드는 것이다. 한 권이 책이 인생을 바꿀 수는 어찌해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하부 문화에 자기가 노출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 권의 책이 자기를 바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런 면에서 메노키오의 몇 권의 책은 심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국가의 수가 많듯이 어느 계율이 옳다고 할 수 없다.(177)는 상대주의적 항변은 16세기 '종교 개혁과 민중 문화의 변화'라는 하부 문화와 가톨릭 교회의 권위 사이에서 고뇌하는 당시의 민중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듯 하다. "그대는 어느 법이 옳다고 말할 수 없"느냐고 묻는 자와 "어느 법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고 답하는 자의 싸움은 결국 어떤 형상으로 돌아갈는지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묻는 자는 답하는 자를 벌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결국 묻는 자는 답하는 자에게 이길 수 없다.

루나르도와의 대화(291)에서 메노키오는 수사가 되기를 원하는 루나르도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라고 전한다. 그 이유는 "그건 동냥아치들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것들이 미시사를 읽는 재미다.
개인의 삶을 유추해 가면, 거기엔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역사 담론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 시기가 오면, 온갖 개인들의 미시사가 담긴 '자서전 류'가 판을 치게 되는 모양이다. 문제는 그 미시사가 객관적이지 못하고 '아전인수'식의 오류를 지나치게 범해버리면, 독자를 기분나쁘게 만들거나 독자를 눈멀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겠지만...

치즈에서 구더기가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193)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신의 개입에 의존하지 않고 혼돈과 무질서하고 거대한 <물질>로부터 탄생하였다는 설명을 하는 메노키오의 입을 통해 이 미시사가가 보여주는 역사는 어떤 것인지... 알 것도 같다.

'성스러운 권위'에 앞서는 '혼돈'과 '자연스럽게 생겨난 존재인 인간들'의 이야기는 신화에도 원용된 바 있는 소재로 "치즈와 구더기"라는 원형적 심상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미시사를 통하여 당시 역사를 가진자의 것에서 '인간적인 것'으로 시점 전환하는 아름다운 책으로 치즈와 구더기를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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