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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추억에 남한산성은 '안대'다.
십오 년 쯤 전, 칠판 위에 올려둔 분필지우개를 내리다 눈에 '톡'하고 맞은 것이 '각막'을 긁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안대를 한 다음날, 하필이면 소풍지로 간 곳이 남한산성이었다.
한쪽 눈으로 내려다본 세상은 그저 멀게만 느껴졌다.
수어장대고 남문이고 모두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또 하나의 추억은 '식당'이다.
시험기간에 일찍 마치는 날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 집이 으리으리했다.
말을 들어보니 박통이 거기서 작은 잔치를 벌이기 좋아했다는 집이란다.
나라를 가진 장군이 남한산성에 올라가 씨바스리갈인지 로열살루튼지를 마시면서 어떤 감회에 잠겼을까? 그 역사를 알기나 했을까? 그저 허리 가는 여자와의 요분질로 권좌의 쓸쓸함을 달래고 만 걸까?
내 기억에 남을 소설 남한산성은 무척이나 재미없다. 애초에 김훈의 소설을 재미로 읽을 생각도 없었지만, 도대체 그는 이 소설을 왜 썼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이 소설은 역사 소설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먼젓번에 읽은 '칼의 노래'에서는 이순신이란 장수의 고독한 마음 속으로 들어간 작가의 심사가 낙엽 냄새를 풍기면서도 비릿한 삶의 내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소설도 역사 소설보담은 심리 소설에 가깝지만, 역사 소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번엔 더 심하다. 남한산성에 올라 비루한 삶을 구하는 왕을 떠올린 김훈은 '권좌'와 '백성'에 대한 상념들을 이렇게 풀어본 것은 아닐까 싶다.
임금은 그야말로 '상징'에 불과한 사람일 수도 있다. 특히 나라가 위기에 닥치면...
아무 힘도 없는 임금 아래서 '관료'들은 온갖 '쑈'를 한다. 누가 충절인지는 역사가 알 일이기도 하고, 역사도 모르기도 한다. 승자가 충신이 되기 때문이다. 평범한 무지랭이들은 싸움보다는 '살고 먹는 일'에 급급하다.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김훈은 남한산성 수어장대에 올라가서, 정신나간 넘이 수어장대에 불지르는 꼬라지를 보면서, 삼백 여년 전, 수어장대에서 꼬장질하던 관료넘들을 향한 화살눈 백성들을 떠올린 것이나 아닐까?
온 나라가 '양극화'의 벼락을 맞아 양 전극으로 분화되게 생겼는데, 그래서 마이너스 전극으로 쏠리는 것을 두려워하며 비루하게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고 있는데, 최고 권좌에 앉은 자는 '손들고 나가서 살 길'을 구하려 하고, 그 아래의 신료들은 횡설수설, 우왕좌왕, 갑론을박, 좌충우돌, 지랄발광을 다 떤다. 쌩 쑈도 이런 쑈가 없다.
올바른 건 아니지만, 백성들은 '나라'의 앞날 같은 것에 관심을 갖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태극기 목에 걸고 미문화원을 점거하던 용기있는 양심보다는 토익점수와 공무원 시험에 목숨을 바친다.
임금의 외롭고 막막하고 쓸쓸함, 어찌할 수 없는 삶의 길을 얼핏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도드라져 읽히는 구절들은 이 땅에 살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 더더욱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도 하고, 또한 역설적으로도 동시에 삶의 가벼움을 체감하기도 하는 사람들에게 찍힌 액센트가 아닐는지...
- 강한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339)
- 나라가 없고 품계가 없는 세상에서 홀로 살고 싶다.(284)
- 성이 위태로우니 충절에 귀천이 있겠느냐?는 질문에 '먹고 살고 가두고 때리는 일에는 귀천이 있었다'는 무서운 대답.
- 나라가 중요한 게 아니라 먹고 사는 일이 중하니, 청병들도 같은 얼음길로 인도하고 곡식을 구하겠다고 하다가 칼을 맞는 뱃사공... 나라가 무엇인가?
글은 멀고 몸은 가까운 현실을 일하는 서날쇠를 보면서 느끼는 지식인의 모습은 서늘하다.
일과 사물이 깃든 살아있는 사람.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있는 말이 정처없는 말 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없는 말이 정처있는 말 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잡는 말의 신기루... 그 본말 전도의 모습이 문화고, 역사고, 사회라는 이른바 학문의 진흙탕이 아니냐...
그 속에서 오로지 먹고 살려고 말을 삶의 길로 선택한 정명수같은 녀석을 생각한다면, 어학 연수로 들끓는다는 중국과 호주, 필리핀까지 버글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한미 FTA 협상단 대표인 김현종이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생각이 나는 건 뭐냐?
가진자들은 아이들을 바다 건너 다 보내는 세상에서, 이 땅 안의 교육 개혁은 요원하기만하고, 복잡한 마음에 '밥이 우선'인 민초들로 빽빽한 세상을 내려다보는 남한산성의 과거와 오늘은 여전히 갑갑하고 답답하고 막막하기만하다.
김훈은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과거지사를 모티프로 잡았을 뿐, 역사 소설을 쓴 것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