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위한 변명 - 숲길 3 숲길 3
마르크 블로크 지음, 고봉만 옮김 / 한길사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어떤 기회였던지... 이 책을 읽어 보고 싶어서 학교 도서관에 문의했더니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번엔 사서 선생님이 직접 이 책을 사 두었다고 메시지를 보내 오셨다.

이런 책은 방학이 아니면 읽기 어렵기 때문에 빌려다 두고는 서가 저 안쪽에 꽂아 두었다.
가벼운 것들부터 읽곤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읽다 보니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었다. '역사를 연구하는 일'에 대한 마르크 블로크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쓴 것이었다. 역사 연구에 대한 관점들을 자유분방하면서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저자뿐만 아니라 역자에게도 감사할 일이다.

간혹 우익 보수 꼴통들은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망발을 서슴지않고 내세운다.
그들은 아는 것일까? 이 땅의 역사 교과서는 친일파를 모태로 한 그들의 역사를 절묘하게 감추고 있는 책이며, 과거사의 사건 중심으로 별 가치가 없는 책임을... 아니, 그 역사 교과서는 쓸데없이 민족주의만을 강조하고 있으며, 전혀 비판적 역사관이 반영되지 않은 것임을 그들이 그토록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역사란 인간에 대한 관심이다. 인간의 살냄새를 추적하는 자들이 역사가들이다.

그리고 역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아주 파편적인 것들이어서 역사가들이 전체를 관망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야기한다.

역사란 결국 '개별적 사건을 일반화'하는 일인데... 그 사료들은 진실성을 증명하는 '유사성'을 가진 자료들과 진실성을 떨어뜨리는 자료들로 가득하다. 거기서 진실성을 증명하는 유사성들을 추출하여 일반화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는 재판관과도 유사하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재판에서는 판결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마련이니까.

그의 이 말이 제일 멋지다.
역사는 다양한 인간성의 거대한 경험이며 인간간의 오랜 만남이다.

박근혜의 한계는 자기 아버지가 독재자임을 아무리 인식하려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관계임에 있다. 전두환의 아들은 화려한 휴가를 아무리 쳐다보아도, 전장군의 우국충정밖에 못 볼 것이다. 숱한 공포정치가들이 훌륭한 가장이었을 가능성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많은 위인들이 사소한 잘못으로 실각하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역사란 그런 한 사람에 의해 나오는 결론이 아니라, 그 다양한 인간성들을 경험하는 거대한 덩어리라는 것이다.

일반화도 쉽지 않다.
역사가들이 말하는 '봉건제'는 모든 나라에서 똑같이 실시된 제도가 아니라는 예를 그는 든다. 한국적 상황에서 봉건적이라는 말은 통할 수 있지만, 조선 시대는 전제 군주 국가였지 봉건제 국가는 아니었다.

동일한 사회환경 속에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특히 자기들이 살고 있는 시기에 필연적으로 유사한 영향을 받는다.

내가 바라보는 역사의 관점은 이런 것이다.
현대의 한국에서 필요한 역사란 고조선부터 삼국, 남북국, 고려, 조선 시대의 통사가 아니다.

왜 한국인들에게 '애국심'이 강요되었던가.
왜 일제 식민 시대의 악몽은 아직도 진행형인가.
한국인의 대인공포증에 영향을 준 유교의 영향은 어떤 것인가.
한국에서 노사 관계와 반상 관계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근세사까지 이어져온 노예제와 양반제의 영향은 어떤 것일까.
광주가 27년 지난 우리에게 심어주는 두려움은 어떤 것들일까.
김대중이나 노무현이 이유없이 싫은 사람들의 뇌구조에는 어떤 기제가 세뇌되었을까...

블로크의 '기이한 패배'에서 이야기하는 말.
전체로서의 사회적 유대는 너무 강하기 때문에 고립해서 존재하는 도덕적 자율성이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란 말은 내 유년 시절의 사고를 강하게 구속한 기제를 풀이한 것 같다.

늑대같은 공산당과 일본놈들에게 끝없이 쫓기며 나락으로 빠져들던 어린 시절의 꿈을 공유한 세대의 사회적 유대만큼 강한 것이 있을까?
윗사람에게 대드는 것은 '쌍놈'도 해서는 안 되는 사회였기때문에, 아무리 폭압적인 선생들 앞에서도 찍소리 못하고 얻어맞으며 자란 세대들에게 '개인주의' '자유주의'를 말하는 것은 가능이나 한 일일까?

역사가의 사관이나 연구 방법에 대한 여느 책들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면, 이 책은 정말 아들이나 학생들에게 편안하게 난롯가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런 책을 읽는다고 역사 속에서 내 개인의 좌표가 확정될 수는 없을지라도, 내 좌표를 흐리우고 싶을 때, 나를 어리석은 쪽으로 몰아넣지 않을 만큼의 혜안을 띄워주기는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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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7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좀 어려워서.. 골똘하게 생각하며 읽었는데..^^ 리뷰 제목이 좋으세요.
근데 블로크는 이 책에서 역사가는 심판관 혹은 재판관처럼 가치판단하기보다 '이해'하고 탐구하라고 한 것 같은데... 아닌가요.(184쪽 이후)

글샘 2007-08-24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긴 좀 어렵죠.
그리고 역사가가 심판관같은 짓을 잘 한다고 한 말이었겠죠.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런 변명을 한 책이라 생각합니다.(역사 샘이 읽어 보면, 그건 아니죠~~하고 혼낼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