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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ㅣ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평점 :
오랜만에 시집을 읽는다.
시를 읽을 때는 하염없이 편한 마음으로 상상력의 날줄을 드리워 두고선, 시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씨줄을 한 번씩 오가게 만드는 '북'이 필요하다.
시를 쓰는 일만 창작이 아니다. 시를 읽는 일도 베올을 짜는 일과 같다.
시를 읽는 마음은 폭신하고 다사로워야 한다.
강파른 마음엔 시의 미늘 한 쪽 꽂힐 여유가 없으니.
박성우 시는 베짜기를 쉽지 않게 만든다.
자꾸 북이 손에서 헛놀고, 날줄에 씨줄이 배이게 먹히지 않고 성긴 느낌을 준다.
마음은 불편하지만, 그의 시에서 형상으로 드러난 것들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친근한 것들이어서 쫀득거리며 시편들에 눈길을 접착시킨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무슨 원한이 져선지, 제 목에 줄을 감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거미처럼 허공중에 헛발질을 하듯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건만...
그의 시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 한 장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한 장면은 눈이 시리도록 슬프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다.
아마도 혼자서 그럴 것이다. "나가 나보고 짠하다 그요~~."
눈사람은 손가락이 없고, 발가락이 없다.
소록도에서 손가락 두 마디가 없어서 작은 구멍으로 단추를 넣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도와주고는 이런 시를 쓴다. 눈사람은 손가락도 발가락도 없지만, 보리피리 불 일도 없는데...
미싱 창고에서 고장난 미싱들 사이에서 고장난 사원이 되는 모습.
그가 잠들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데,
<잠을 잔다>고 되어 있어 깜짝 놀랐는데, 아랫단에선 아니나 다를까.
<는 생각을 잊는다.>고 되어 있다. 이 사람, 괜스레 눈물 냄새가 나는 사람이다.
나 는 니 가 좋 은 디... 하던 선자, 고년을 생각하며...
오이 꼭다리가 왜이리 쓰다냐...하는 장면은 얼핏 웃음을 물려 준다. 산다는 게 그런거지.
길손다방 늙은 여자를 <세상이 서둘러 단풍들게 한 그여자>로 표현하는 시인. 마음이 참 이쁘다.
<세상과 색깔을 맞추면
일상은 얼마나 편안해지는가, 더러는...>하는데
염소똥과 파리떼의 동글동글한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젖을 빠는 파리가 징그럽지만, 그건 바로 나였다.
이름을 잃은 어깨 끈달이 미싱사. 부라보콘을 흘리지 않아도 반창고로 하얘진 손가락으로, 엄마에게 전화기를 누른다. 아, 거미보다 그의 시선은 섬세하다.
거미줄의 방사상 줄에는 끈기가 없지만, 달팽이처럼 휘감긴 줄에 끈기가 있듯이,
그이의 섬세한 시선에는 작고 볼품없는 존재들은 끈끈하게 달라붙지만 떵떵거리고 사는 큰 넘들은 투명인간처럼 휙 지나갈 따름이다.
작고 작은 것들을 바라보는 거미의 시인 박성우.
그의 아름다운 눈.
끈끈한 눈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