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그라드의 성모마리아
데브라 딘 지음, 송정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이제는 뻬쩨르부르그가 된 레닌그라드.
굳이 제목을 레닌그라드의 성모마리아라고 지은 것은, 공산주의 혁명의 영웅 레닌을 기릴 만큼 소련 제2의 도시에서 일어난 일에 무게 중심을 얹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지어 본다.

이 책의 표지에 <미국 문단이 주목하는 신예 작가, 데브라 딘 감동 소설>이라고 작지만 잘 띄게 적어 두었다. 랜덤하우스란 출판사의 장삿속이 잘 보인다. 감동 소설이라는 분야가 요즘 생겼나? 감동의 프랜차이즈랄까? 그리고 소설의 맨 앞에 작가 서문이나 뭐, 한국의 독자를 만나 반갑다는 이런 글 대신, 나는 잘 모르는 어떤 아나운서의 애독일기를 하나 붙여 두었다. 그래도 어느 아나운서처럼 제가 번역했다고 안 하고 3번 열심히 읽었다고 했으니 조금 용서해 줄 수 있겠다. 정말 세 번 읽지 않았대도 말이다. 회사 욕은 나중에 또 하자.

이런 사소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 참 좋았다.

우선, 예술 작품을 설명하는 큐레이터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마치 유럽의 궁전이나 박물관을 들렀을 때 가이드들이 열심히 주워 섬기던 목소리들과 오버랩되는 경험이 되살아나는 듯, 현장감있게 생생하게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달착지근한 초콜릿 하나를 시식 코너에서 나눠주고는, 그걸 살 여유도 주지 않고 재빨리 돌아서 사라진 여인의 향기처럼 또다른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밀어넣은 채로... 아, 빨리 큐레이터의 달콤하고 아름다운 설명을 더 듣고 싶은데...

이야기는 반전되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할머니 이야기로 이끌린다. 이 소설의 주축이 되는 이야기는 마리나의 치매 이야기다. 젊었을 때의 기억, 전쟁의 기억, 전쟁 속에서 미술관을 지키던 기억은 분명한데도 딸의 얼굴도, 딸의 이혼도, 손자의 결혼 사실도 갑자기 낯설어지는 삶이란... 전날 밤의 과음으로 기억이 끊겼다가 불현듯 소파에서 눈뜰 때의 기분과 같을까? 정신차리고 보니 갑자기 내가 있는 곳이 낯설고 주머니에 지갑도 휴대폰도 없어졌을 때의 황망함처럼...

소설은 총 10장으로 진행되는데, 그 1장이 상실이고, 9장이 실종이다. 기억의 상실과 함께 주인공의 인생이 실종되어버리는 과정 속에서 과거의 기억과 단속적이지만 현재의 상황들이 파편적으로 나열되고 있다. 그렇지만 작가는 '기억 상실'의 과정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10장의 제목을 <초록의 세상>이라고 붙인 것으로 보아, 기억의 상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할 것이 얼마나 될까? 내 옆자리에 누워서 베개에 머리를 비비대며 숨을 고르고 잠들어있는 아내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날마다 만나고 인사하며 지내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긴 '일들'이 과연 기억할 만한 가치들이 있는 것일까?

마리나가 잊지 않았던 미술관의 기억들, 남편이 된 드미트리와의 추억들, 영원히 각인되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미술품들의 생생한 모습들처럼, 그 '초록의 세상'이란 이름의 '절대 경지'를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런 주제에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만다. 이런 시시한 것이 인생일는지도 모른다.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관계들의 집대성, 우리의 뇌는 말랑말랑한 젤 상태의 전해질이라 순간순간 찌릿찌릿하는 끝없는 전류의 흐름으로 '기억'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기억이란 것이 전류의 작용이기때문에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인쇄된 고형물이 아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기억은 모두 착각일 수 있다. 착각이 무가치하듯이 모든 기억은 무가치할 수도 있겠지.

뭐, 이런 생각을 재미있게 쓴 소설이다.
전쟁 이야기가 지긋지긋하게 나오지 않아서 좋았고, 앞에서 쓴 대로 미술품을 설명하는 카랑카랑하면서도 온화한 목소리를, 그 뚜벅거리는 러시아어로 떠들어대는 듯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아픈 것은, 한반도에 남은 문화재의 부실함에 대한 것이었다. 유럽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모두 '장물 전시장'에 불과하기도 하지만, 암튼 그 궁궐이나 미술관, 박물관의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 될 법한 것들이었다. 러시아의 황제들 역시 그런 사치의 극을 달리며 살았으리라. 중국의 베이징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땅에 건조된 건물들은 그 숱한 전쟁의 참화에 남아난 것이 없다. 모두가 개발독재 시절에 지어진 것들이어서 시멘트 냄새가 풀풀 난다. 어느 구석인가는 늘 공사중이며, 박물관 안에 들어가서 돌아다니는 동선 자체가 관공서를 헤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청원 경찰복같은 옷을 주워입은 관리인들의 모습은 아직도 문화에 대해서 깜깜한 모습들이다.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북측의 건축물들, 그 '궁전'들이야말로 더욱 거대하고 웅장하기만한 돌덩이임은 한반도 문화 예술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닐까 싶다. 일제는 경복궁을 깨부수고, 다시 독립 정부는 총독부 건물을 깨부수는 역사의 악순환이 이 땅의 구석구석을 더럽히고 있다. 일본놈들은 산의 혈맥마다 쇠말뚝을 박았다더니, 미국놈들이 비켜준 군사 시설의 땅 속에는 온갖 오염물질들이 차고 넘치는 모양이다. 정말 <괴물>이 등장할 법한 무서운 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세계대전 중인데도, 더 안전한 곳으로 미술품을 옮기는 기차가 몇 차례나 오고간다는 이야기, 있지도 않은 미술품들을 '인민'을 위하여 풍부한 상상력으로 설명해주는 아름다운 큐레이터의 이야기, 오랜 역사를 가진 궁전이 미술관으로 쓰이게 되는 역사의 유전 등은, 아름다운 덕수궁의 아기자기한 돌담 안에 어색하기 그지없는 석조전으로 남은 한국의 건축물의 몰개성에 대하여 가슴아픈 회한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난 가끔 시립박물관과 유엔 공원, 문화회관을 잇는 동선으로 산책을 나가곤 하는데, 그 건물들의 네모 유전자와 직선 지향성에 대하여 매번 실망이다. 역사의 때가 좀 묻은 건물들을 한 100년 후의 아이들은 구경할 수 있으려나?

재미있는 소설을 읽으면서, 재미없는 생각들을 하는 게 내 특기인지도 모르겠다.^^
잘 쓴 소설을 <잘 못 만든> 출판사에 몇 마디 잔소리를 내두르며 리뷰를 마친다.
책을 좀더 뜸을 들여서 만들지 못한 흔적이 구석구석 남아있다. 한두 번만 더 교정을 꼼꼼하게 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랄까. 처음 한두 번은 그냥 스쳐지났는데, 나중엔 굳이 표시를 해 두면서 읽었다. 정신 좀 차리면 좋겠다.
8쪽 3째줄 : 윤기 흐르는 모을 드러냅니다.(모양, 모습인가본데, 말도 안 되는 글이 많이 등장한다.)
137쪽 아래서 5째줄 : 한눈에 부드러워지는 느낄 수 있었다. (부드러워지는 것을 이겠지?)
278쪽 아래서 2째줄 : 갈 증을 띄어서 썼다.(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신뢰성을 잃기로 들면 대책없는 게 인간 맘이다.) 띄어쓰기가 안 지켜진 곳은 제법 있는데 다 지적하진 못하겠다.(혹시 돈 준다고 찾아 달라면 꼼꼼하게 읽겠지만 ㅋㅋ)
285쪽 6째줄 : 아뇨.. 마침표가 두 개. (왜 그런 거만 보냐고 따지면 할 말 없다.)
333쪽 2째줄 : 폭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있기 위해... 보호하기 위해겠지...

그리고, 가운데 넉 장 들어있는 그림들의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하다.
내가 빌려본 책은 네 페이지는 글자가 선명하지만, 네 페이지는 글자가 흐려 읽기 힘들 지경이다.

랜덤 하우스! 제발 책을 띄엄띄엄 만들지 말 지어다.
random이 띄엄띄엄 되는대로여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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