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지성인이다
헨리 지루 지음, 이경숙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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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지루의 '지성인으로서의 교사 Teachers as intellectuals'의 번역본이다.

쉽게 술술 읽기 어려운 책이다.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고, 지루의 지루한 문체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주제 자체가 쉽지 않다. 원 제목이 Toward a critical pedagogy of learning인걸로 봐서 변혁적 교육운동에 대한 주제에 강조점을 두었던 것 같다.

과거 많은 교육개혁 운동과는 달리,
현재의 교육개혁 요구는 공립학교 교사들에게 미국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위협과 도전 둘 다를 선물하고 있다.
현 교육개혁안들은 공교육 교사들이 청년들에게 지
적, 도덕적 지도력을 발휘할 능력이 없다고 보는 점에서 분명히 교사들에게 위협적이다.
교육개혁 논의에서 오히려 교사는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교사들은 일상적인 교실 생활의 현실과 거리가 먼
전문가들이 내린 지시나 결정해 놓은 목표를 달성하는 고등 기술자로 전락하고 있다.
교육개혁의 성격과 절차를 비판적으로 검증해 보면 교사들을 배제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235-6)
현재 정치적 분위기는 여러모로 교사들에게 불리하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이런 분위기는 교사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함께
대중적인 토론을 벌일 수 있는 도전의 기회이기도 하며,
교사양성과 현직교사 프로그램, 일반적인 교실수업의 성격과 목적 등에
절실히 필요한 자기 비판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 토론을 통해 교사들은 근무조건 개선을 위해 집단으로 뭉칠 기회를 얻을 수 있으며,
공교육을 개혁하는 중요한 시기에 반드시 교사가 중추 역할을 해야 한다
점을 대중들에게 증명할 기회...


21세기가 시작되면서 미국 공교육은 이중의 위기를 맞고 있다.
위기의 한 측면은 신우익의 등장과 함께 신우익들이
학교에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퍼붓고 있음이다.
위기의 다른 측면은 진보적 교육자들이 자신의 전망과 전략을 갖고서
신보수주의적인 교육정책에 제대로 대처해내지 못하고 있음이다.(319)

이 이야기들에 '미국'이란 말만 없었다면, 한국의 교육 현실과도 너무도 부합하는 말들로 보인다. 이 책을 움켜쥐고 읽는 동안, 가슴이 많이 뜨끔했고, 머리가 많이 띵했고, 많이 민망했지만, 과연 나의 모습을 어떻게 변혁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이 책에서 그가 말한 것처럼, 이 변화의 시대에, 거꾸로 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 시점을 <진지한 자기 비판의 기회>로 삼고, <공교육을 개혁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감이다.

 제1장에서는 <교육과정>을 다시 바라보는 장이다.

새로운 교육과정 양식의 근거는 비판적이면서 역사적이어야하며,  개인적이어야... 단, 개인의 독특성과 요구를 특정 사회의 실재로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개인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다양한 언어와 문화 자본의 형식들 활용이 중요하다는 것 알아야>하는 교육과정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일별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얼마나 '개인의 영달을 위한 교육'으로 치닫는지를 생각하면 낯이 뜨거워질 따름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치중립이라는 주장 포기해야 하는데, 아직도 교육은 중립이란 족쇄에 휘둘리며 가진자의 편에 서는 것 같다.

학교는 젊은이들을 현재의 사회에 적응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을 키우는 변혁적 임무를 맡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 학교는 너무 앞쪽에 치우친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함이 앞서고,

학생들은 공식적 교육과정의 내용에서보다는 학교의 세 가지 메시지 시스템에 배인 이데올로기에서 훨씬 많은 것을 배운다. 교육과정 시스템, 교육유형 시스템, 평가 시스템... 이런 저자의 의견은 벽돌처럼 균일한 아이들을 만들어 내는 '프로크로스테스의 침대'로서의 학교를 반성하게 한다.

애플은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게 할까?’만의 문제가 아니다.(117)고... 하며,‘어떻게 그리고 왜 특정 집단 문화가 학교에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지식으로 전달되는지’ 비판적으로 감토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공식적인 지식이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적 형상을 어떻게 재현하는가>, <학교는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앎의 표준을 어떻게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로 정당화하는가>에 답해야 할 것이란 말이다.

1. 학교의 기본적 일상 규책들이 어떻게 지배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가?

2. 교육과정의 특정 지식이 지배이데올로기 형상을 어떻게 재현하는가?

3.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교사들이 자기 활동을 정하고 이끌고 그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근본적인 관점에 어떻게 반영되는가?

세계관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습관을 의식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도록 돕는 것. 세계관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늘려준다는 이론이 타당하다면, 세계관은 우리 자신의 권력을 통제하고, 그 권력을 비판적이고 합리적으로 반성하고, 장차 우리의 행동 방식을 향상시켜줄 것이다.

결국 교육은 비판적이고 올바른 세계관을 갖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

제2장에서는 글쓰기와 목소리 내기의 문제를 교육과 연관지어 다룬다.

위대한 진실은 비판받기를 원하지 우상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학생은 국으로 있기를 바란다.
그 침묵의 문화를 거부하는 일은 정말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의사소통의 통로 개방도 아직 머나먼 일이다. 계급의 언어를 사회화 하는 형식, 학생과 교사가 함께 협상하여 만들어낸 의미로서의 학교의 각종 규칙들은 아직도 구각을 벗지 못한 것 투성이다.

지루는 비판적 글쓰기는 하나의 과목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아이들의 생각을 열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민주적 삶과 가까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교사들은 자신의 교육학을 재형성하고 재구조화해야 한다. (145) 교육학은 암기과목이 되어선 안 된다.
프레이리 (163) 비판적인 태도를 계속 발휘해야 사람들은 순응의 자세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학은 교사가 될 사람들의 암기과목에 지나지 않은 것 아닐까?

인쇄문화는 개념화의 방법을 더욱 향상시키고, 전자매체와 영상매체의 억압적 역할을 걷어낸 사회조직까지도 개발할 수 있게 한다. 브레히트가 글을 썼을 때보더 훨씬 절실한 문제. “굶주린 자네, 책을 움켜쥐게, 책이 무기야.”(180)

언어를 기술적 의미에서 개념 정의하거나 대화와 정보전달 같은 의사소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의미에서 정의함으로써 언어를 탈정치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학생들이 알아서 입다물게 하는 데 언어 실천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202)

문화와 언어는 결코 사람을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 같다. 여기에 기여하는 학교도 마찬가지다. 결코 중립일 수는 없다.

 3부에서 교육의 지성적 비판적 역할에 대하여 그는 맨앞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교사의 '역할'을 강조한다.

교육의 원리는, 학생들을 적극적이고 책임감있는 시민으로 교육하는 과제를 조직 원리로 삼아야 한다. 즉 스스로 결정하며 사려깊고 민주적인 삶을 위해 투쟁하는 지적 기술과 용기를 갖춘 시민으로 교육해야 한다. (256)

그람시는 ‘지성인을 사상의 생산자이자 전달자라는 문자적 의미 이상’을 생각한다. 즉 지성인은 관념과 사회적 실천을 중재하고 정당화하고 생산하는 ‘정치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278)

글자를 읽으며,
과연 나의 삶이 이 글자들과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았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삶과 직결되진 않는다.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이미 19년째 접어들었다.
아직도 올곧은 선생이 되지 못한 내가 부끄러울 때가 많기만 하다.
아이들 앞에서 당당하고, 아이들에게 삶의 실천적 방향을 고민하게 하는 변혁자로서의 교사의 역할은 왠지 내 옷이 아닌 것 같다.

앞으로 남은 20여년의 정년까지의 기간을 비참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는 올곧은 정신을 가다듬어야 할 때다.

스승의 날 아이들에게 받는 한 송이 카네이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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