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한국의 남성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윗사람들에게 복종적이고, 군대 이야기와 축구 이야기를 즐겨 하며, 여성을 자연스런 파트너쉽으로 대하지 못하고 물질적으로 접하기 쉽다는 것. 남자들끼리 술 마실 때 가정사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진급과 학벌 사회란 망령 속에서 배회하는 외로운 영혼이라는 것.

이런 특이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 배경은 어떤 것일까?
가부장적 사회에서 길러진 사회성?
아니면 군대와 수직 사회에서 얻어진 본능?
그것도 아니라면 혈액 속에 끈적하게 흐르는 보이지 않는 진한 유전자의 힘?

그런 것들을 정말 쫀득쫀득한 이야기로 풀어내서,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듯이 보이는 언설로 '한국 남성의 정체성'을 정치적 언어로 도출시켜내는 새로운 이야기법을 쓰는 작가를 만났다. 이름도 좀 별난 가수 같은 전인권이다.

이 책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지나치게 많다 싶을 정도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그렇지만, 글을 읽어가는 도중에 자기도 모르게 지은이가 의도하는 구도의 형상을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한번 잡으면 놓기가 힘든, 성장 소설을 닮은 사회학 책이다.

이 책의 표지에는 저자의 사진을 타이포그래픽으로 그린 글자 그림이 있다.
이 글들을 읽어 가노라면 저자의 사진을 느낄 수 없지만, 글자들의 번짐을 의심하며 좀 멀찍이서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전경화되도록 배치해 둔 것이다.

한국 남자들의 '집단성'은 남다르다. 학연을 따지고, 지연을 따진다.
그것보다 '위계성'은 더 유별나다. 학번을 따지고, 나이를 따진다. 존대에서 금세 나너들이로 넘어간다.
그리고 '남성성'은 정말 우스울 지경이다.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은 수이 나오고, 술자리에서 불쾌할 정도의 음담패설도 서슴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연,놈들이라고 했어도 괜찮다는 판결도 나올 정도로 남성에게 관대한 사회다. 우스울 정도로...

이 사회의 가부장제란 여성의 무한한 비루함을 딛고 선 가부장제였고, 신분제의 아랫사람들의 부단한 희생 위에서의 가부장제였다. 욕설에도 '니기미, 니에미'가 붙은 욕설은 흔하지만, '니 애비'가 붙은 욕설은 드물잖은가. 기껏 애비 없는 '호로시키' 정도가 있을 뿐.

그렇지만,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술자리에서 갖가지 가오를 잡아 보지만, 한국의 남성들은 초라하다.
수직의 계급 사회에서는 언제나 아랫사람이 많게 마련이고, 가오를 잡고싶은 윗사람일수록 더 윗사람에게 꼼짝도 못하는 법이다. 회사에서 퇴근하고도 '과장님', '부장님'으로 대접해야 하는 '공과 사가 구분되지 않는, 아니 구분해선 안 되는 사회'다.

난 내가 선택한 교사란 직장이 가장 좋은 점은 '진급'이 없다는 점이라고 생각해 왔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내가 발령받았을 때, 호적 나이가 만 22세였는데, 퇴직할 만 62세까지 진급이 없다고 해도 상관이 없는 직장. 이 직장 밖의 사람들은 그 매력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위아래 없이 열댓살 윗사람도 '형님' 대접하며 잘 지낸다. 맘에 안 내키면 '쌩까면' 그만이다.

이 책에서 제일 멋진 말. 진정한 예술과 학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란 말이다. 이 사회는 참 뒤틀려 있어서 있는 그대로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있는 그대로 보다가는 크지도 않은 코가 박살이 날 정도로 무서운 본때를 보여주는 지독한 사회다. 아직도 이 사회는 '사랑'에 대해서 관대하지 않다. 중고생들이 손을 잡고 다니는 것도 용인하지 못할 정도로...

권위주의로 무장한 국가.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운 사회. 말이 많으면 빨갱이란 무지막지한 비논리로 '있는 그대로 보는 이'들을 탄압한 역사를 가진 사회.

그 사회에서 남자의 정체성을 갖게 된 자신의 이야기를 가족으로 외연을 넓히고 결국 국가와 사회까지 연결시킨 수작이다.

의아한 것은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이 '박정희 전기'일진대, 175쪽의 주에 '한국은 미국이 협조를 요청해야 하는 하위 파트너'라고 한 것에 물음표를 붙이고 싶다. 저자가 이 글을 읽을 확률은 극히 적지만, 박정희가 케네디에게 밉보였던 것을 만회하려고 '오버 액션'을 해서 베트남 참전을 하게 된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렇게 얼버무려 표현해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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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4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7-02-04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지금 찾아보니 재작년에 타계하셨군요. 왜 좋은 분들은 일찍 가시는 걸까요... 아쉽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방과 제국,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