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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한국 시나리오 선집 - 제19권 2001년도 선정 작품
영화진흥위원회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2년 11월
평점 :
지난 주에 99년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읽어서 지난 토욜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왔다.
일요일, 가족들이 모두 감기에 걸려 비몽사몽 잠을 자는 와중에 비디오를 빌려다 보듯이 시나리오를 끼고 앉았는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다 읽었다.
2001년 시나리오 선집에는 고양이를 부탁해, 고추말리기, 꽃섬, 라이방, 번지점프를 하다, 봄날은 간다, 소름, 수취인불명, 와이키키브라더스, 킬러들의 수다, 파이란의 11편이 실려 있다.
내가 본 영화는 번지점프와 봄날, 수취인 불명, 파이란의 네 편인데, 읽었더라도 정말 실감났다.
영화를 봤으면 본 대로 장면들이 떠올라서 재미있었고, 안 본 것은 안 본 대로 상상력을 동원했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평범한 아니 중간 이하의 처녀들의 심심한 나날들을 예민하게 캐치한 영화, 그야말로 고양이같은 감각을 지닌 글이었다.
고추말리기는 부득부득 옥상에서 고추를 말리는 할머니의 모습과 퉁퉁한 영화인의 솔직한 일상 이야기.
꽃섬은 아기낳은 여고생, 설암에 걸린 가수, 피아노를 사려 매춘을 하려는 여자들을 통해 독창적인 캐릭터를 창조한다.
라이방은 택시 기사들의 요모양 요꼴로 사는 인생들을 앵글에 담지만, 그늘을 찾아 베트남으로 떠나는 영화.
번지 점프는 이은주의 죽음을 예견한듯한 영화로 유명하다. 러브스토리와 환생을 재미있는 입담과 장치들로 떠받치는 시나리오.
봄날은 간다...는 이혼녀 은수를 향한 상우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영화다. 은수가 피곤하면 자고, 집 정리 안 하고 대충 사는 모습은 여느 남자들의 그것과 같다. 여성들이라고 집 정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난 그 시선이 좋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하는 순수함과 버스와 여자는 잡는 게 아니란 할머니의 말은 그렇게 삶을 관통하는 각각의 진실이다.
소름은 미스터리물.
수취인 불명은 김기덕스런 시나리오. 미군기지 옆의 평택에서 벌어지는 혼혈과 총을 갖고 놀다 애꾸가 된 은옥, 개 백정인 개눈, 제임스의 등장까지, 이 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추어주는 끔찍한 영화다. 나는 가방끈 긴 인간들의 눈보다 가방끈 짧은 김기덕의 시선이 열라 좋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한때 음악에 빠졌던 청춘들이 나이트 밴드로 겨우 입에 풀칠하는 궁상맞은 삶들이 펼쳐진다. 그 중에 인희랑 이름의 여인과 성우의 애틋한 사랑은 친구에 나오는 레인보우를 떠올리게 한다.
킬러들의 수다... 이 글, 꽤 재밌다. 정말 수다스런 킬러들. 이런 글을 애들이 읽으면 정말 킬러란 직업 재밌고 세상에 죽일놈 많은데 꼭 필요하고, 돈도 많이 번다고 착각할는지도 모르겠다.
파이란은 양아치 강재를 위장결혼한 파이란을 통해 인간으로 만든다는 영화다. 파이란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상상력이 필요한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에게 시대에 덜떨어진 희곡보다는 시나리오를 읽히는 일이 훨씬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 이번 겨울 방학은 시나리오에 중독돼서 다른 빌려다 놓은 책을 못 읽을까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