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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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만가만한 것을 좋아한다.

가만한 당신이 좋고,

가만히 있는 돌이 좋다.

 

이 길, 천지에 기댈 곳 없는 사람 하나 작은 보따리로 울고간 길

그리하여 슬퍼진 길

상수리와 생각나무 찔레와 할미꽃과 어린 풀들의

이제는 빈, 종일 짐승 하나 지나지 않는

환한 캄캄한 길

 

열일곱에 떠난 그 사람

흘러와 조치원 시장통 신기료 영감으로 주저앉았나

깁고 닦는 느린 손길

골목 끝 남매집에서 저녁마다 혼자 국밥을 먹는,

돋보기 너머로 한번씩 먼 데릴 보는

그의 얼굴

고요하고 캄캄한 길(풍경의 깊이 2, 전문)

 

해설에서 <생과 죽음 사이의 섬세하고 민감한 계면>을 쓰는 시인이라 했다.

그렇다.

우연히 돌연히 삶이 시작되었으나,

겸손하지 못한 또는 어리석은 인간은

그것을 엄청난 것처럼 착각한다.

 

<행방불명>으로 자주 번역되는 '카미카쿠시'란 일본말이 있다.

神隱し라 쓰는데, 신의 세계로 숨어버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곧 시간과 육신의 유무 자체가 어떤 면을 경계로

있다가 풀어져 버리는 것을 가리키기에 좋은 단어일 듯 싶다.

그 경계를 노래하면 '계면조'가 되겠다.

 

모진 비비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노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꽃, 전문)

 

역시 시점이 넘나든다.

해설자는 '박수'라 명명했지만,

그 계면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은 가만하지만 깊다.

 

시쓰기는 생을 연금하는

영혼을 단련하는 오래고 유력한 형식이라고 믿고 있다.

시 뒤편 어둑한 골방으로 서둘러 돌아갈 일.(시인의 말)

 

시는 언어로 절을 짓는 행위라 했다.

인간의 영혼은 온 곳을 모르고

갈 길을 몰라 늘 허청거린다.

어둑한 골방에 눕히는 시의 언어는

그래서 서늘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인생사를 묽게 풀어낸다.

 

논어에 지자 불혹, 인자 불우, 용자 불구...라 했다.

미혹되지 않고,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한다.

그의 언어를 읽을 만한 이유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부분)

 

김명인의 시를 모방한 그의 언어들에서,

가치라는 것이 무어냐고,

인간들의 무리지은 생각인 '윤리'가 도대체 뭐냐고,

술취한 노인의 맥빠진 질문이 들린다.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짓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놓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 김명인의 「너와집 한 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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