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태풍 ㅣ 국내 미출간 소설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박현석 옮김 / 현인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태풍...은 그냥 센 바람이 아닌데...
제목인 野分(노와케)은 센 바람이란 의미의 태풍이다.
1905년의 고양이로소이다 이후, 2년만의 글이다.
그 사이에 도련님과 풀베개를 썼으니 그이 초기작이라 할 만하다.
주인공 시라이 도야는
근대 초기의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그 제자인 다카야나기는 병약한 염세가이고,
그 친구 나카노는 대범하고 부유한 인물이다.
학문을 닦은 사람,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부자가 돈의 힘으로 세상에 이익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에서
학문으로 또 깨달은 이치로 사회에 행복을 주는 것.
따라서 위치는 다르지만 그들은 도저히 범할 수 없는 지위에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233)
다카야나기 역시 가난하고 병든 몸으로
살아나갈 길이 막막한데,
각혈까지 하게 되니 나카노가 100엔을 변통해 주고,
그것으로 결국 무능한 시라이 도야의 빚을 갚는데...
세상은 명문, 부호, 박사, 학자까지 구가하지만,
공정한 인격을 만나고도 지위를 무시하고
금전을 무시하고 혹은 그 학력, 재예를 무시하고
인격 그 자체를 존경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인간의 근본 의의인 인격에 비판의 기준을 두지 않고
그 껍데기인 부속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한다.(77)
초기 작이라 그의 의도가 날것 그대로 드러난다.
인물이랄 것도 없고,
시라이 도야의 목청으로 세상을 야단친다.
하얀 나비가, 하얀 꽃에
조그만 날개가, 조그만 꽃에,
어지럽네, 어지럽네.
기다란 근심은, 기다란 머리에,
어두운 근심은 어두운 머리에
어지럽네, 어지럽네
덧없이 부는 태풍,
덧없이 사는가, 이 세상에
하얀 나비도, 검은 머리도
어지럽네, 어지럽네.(135)
노래 가사가 등장한다.
이 태풍이란 것에서 제목을 가져온 듯하다.
세상의 덧없이 부는 태풍에
나비도, 꽃도, 인간도 흔들려 어지럽다.
가난한 인격들이지만 도야 선생과 야나기의 가난은 다르다.
도야 선생이 본 천지는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천지였다.
다카야나기 준이 본 천지는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천지였다.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천지이기 때문에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도 원망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천지였기 때문에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는 세상을 잔혹하다고 생각했다.
보살피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과
보살핌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은 이 정도로 다르다.
타인을 지도하는 자와
타인에게 의지하는 자는 이 정도로 다르다.(156)
다카야나기의 비관은 역사가 깊다.
과거를 돌아보면 횡령한 아버지의 죄가 있었고,
미래를 바라보면 병이 있었다.
현재에는 빵을 위해서 하는 필사가 있었다.(170)
이런 제자에게 도야의 <외톨이는 숭고한 것>이라는 말은 공허하다.
주객은 하나다
주를 떠나 객이 있을 수 없고
객을 떠나 주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주객을 구분하여 물아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생존상의 편의다.
형태를 떠나 색이 있을 수 없고
색을 떠나 형태가 있을 수 없는데
굳이 개별화하는 편의,
착상을 떠나서 기교가 있을 수 없고
기교를 떠나서 착상이 있을 수 없음에도 잠시 두 가지를 따로 보는 것의 편의와 같은 것이다.
일단 이런 구별을 두면 우리는 하나의 미로에 들어간다.
그러나 생존은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에 생존에 편리한 이 미로에는
더욱 깊이 들어갈 뿐, 나오기는 어렵다는 느낌이다.(189)
다카나야기는 그래서 기가 죽는다.
혼자라는 사실을 불쾌하게 생각해요.
불쾌하다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오면 될 걸,
더욱 움츠러들기만 해요.(190)
<숭고한 외톨이>가 되지 못하는 다카나야기.
한자로 높을 고, 버들 류를 쓰니, 高柳
뜻은 높지만, 버들가지처럼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상징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은 반백의 노인입니다.
젊은 사람에게는 돌아볼 과거가 없습니다.
앞길에 커다른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과거를 돌아보며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젊은 시대입니다.(220)
소세키의 안에서 다카나야기라는 염세적 병자와
가난하지만 초월하여 근대를 받아들이는 도야의 정신이 혼란을 일으키는 시기의 작품이리라.
마치 태풍 앞의 나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