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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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선생이 별세하셨다.

이 책을 오래 붙들고 읽고 있다가, 마침내 책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여둔 책을 어제서야 여행가방 귀퉁이에서 찾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같은 불문과 출신인 김현 선생 생각이 많이 났더랬다.

 

김현 선생의 기록들에는, 싸움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그렇지만 현실의 비명에서 결코 고개돌릴 수 없는 지식인의 고뇌가 그대로 드러난다.

난 글쟁이들의 글에서,

용산의 비명과 쌍차의 비극,

묻혀간 소, 돼지, 닭들의 울음과

세월호의 눈물이 없는 글에는 침을 뱉는다.

내가 리뷰를 쓰지 못하고, 책도 잃어버린 그 동안에 고인이 되어버리셨다.

명복이란, 저세상에서의 복을 빈다는 뜻이련만, 그이들은 복을 바라지 않으실지도 모르겠다.

 

악독한 강철이 지나간 자리는 봄도 겨울이라는데

이 얼어붙은 여름을 보자고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민주화를 염원해온 것은 아닐 터.(31)

 

이 시평은 세월호 이전의 것이다.

육사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했던가...

 

우리의 근대문학이 그렇듯이

미당은 안타깝게도 흠집많고 일그러진 진주지만

안타깝게 여전히 빛나는 진주.(330)

 

평론가로서 솔직한 평이다.

그 흠집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으면

신경숙이 되고 고은이 된다.

 

아침마다 연꽃 장엄보러 몸 열고 나가는 나의 봉행이 또한 꽃장엄이다.

이 외로움 일행으로 꽃장엄하며 여기까지 왔다.

상처로 꽃 터뜨려 여기까지 왔다.(정진규 시인의 부고를 듣고..., 338)

 

삶은 화엄의 세계를 만나는 일이라 일컬은 시를 만나며

상처를 되새긴다. 삶에 상처가 없이 어찌 삶이랴...

화엄이라는 말은 삶을 무겁게 반영한다.

꽃처럼 화사하다고만 표현한 '화양연화'에 '장엄할 엄'을 덧붙였다.

코메디와 트래저디의 결합인 셈이다.

 

언어는 사람만큼 섬세하고

사람이 살아온 역사만큼 복잡하다.

언어를 다루는 일과 도구가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한글날의 위세를 업고 이 사소한 부탁을 한다.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97)

 

사소한 부탁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그 사소한 부탁은 한글 프로그램에서 맞춤법에 어긋나는 붉은 줄에 대한 것이다.

참 사소하나, 언어는 삶을 반영해야 하므로,

틀린 것에 주의해야 한다.

붉은 줄이 가서 틀린 것이 되어버린 우리말에 대한 사소한 애정이 느껴진다.

 

문단에서 신경숙에 입다물고 있을 때, 선생은 이렇게 적었다.

 

잘팔리는 작가에서 훌륭한 작가가 되는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가의식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아내지 못했다.

이 정황은 신경숙씨 개인의 불행을 넘어서

문단의 불행이 되었다.(132)

 

결국 고은의 사태까지 번지고 문단이 문학을 망쳐먹은 꼴이 되었다.

그 민주화의 앞자리에 섰다던 자들이 사실은 고루한 권력의 흉내를 냈던 셈이다.

 

지옥은 진정한 토론이 없기에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이다.

지옥에 대한 자각만이 그 지옥에서 벗어나게 한다.

헬조선은 적어도 이 지옥이 자각된 것이다.(156)

 

2015년의 글이다. 예술인에 대한 검열을

스탕달의 '적과흑'에 나오는 토론 없음에 빗댄다.

아, 큰 스승을 잃어버렸구나...

 

구의역의 젊은 수리공을 제 자식처럼 여기거나 여기려한 사람들과

나향욱들의 차이는 위선자와 정직한 자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이며,

슬퍼할 줄도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들과

가장 작은 감정까지 간접화된 사람들의 차이다.

사이코패스를 다른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179)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드루킹 특검에 단식까지 했던 개새끼들...

결국 부끄러움을 아는 노회찬이라는 아까운 정치인만 잃고 말았다.

사이코패스는 정의될 수 없다. 그냥, 개새끼다.

정의내릴 때는 '유사한 것들과의 차이'를 앞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미소지니(미조지니)의 번역 '여성 혐오'에 대한 심사숙고도 의미있다.

 

스탕달은 '여자다워야 한다는 모든 사회적 요청에 덜 노출될 때,

여자는 모든 편견과 부르주아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했다.

우리가 만나고 기대하는 '여자다움'이 사실상 모두 '여성혐오'(185)

 

번역어에 대한 고찰에서, 문맥의 단절과 가치를 부정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지식인만이 해낼 수 있는 작업이다.

이런 큰 지식인을 잃은 사회는 더 어두워질 것이다.

 

남자의 서사는

못난 살인자의 서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웅의 서사다.

먼저 들어야 할 것은 희생자의 서사다.

역사의 발전은 늘 희생자의 서사로부터 시작한다.(219)

 

여성 문제에 대하여 발언하지 않는 지식인이 대부분이다.

뭐라고 한 마디 하기만 하면, 페미니스트니 동성애 찬성론자니 하며 교회쟁이들이 난리를 친다. 우습지만 비극이다.

 

한국의 특이한 '등단' 제도에 대한 비평.

 

등단, 비등단을 칼같이 가르는 당단 제도도

모두 남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열등감 문화의 소산(191)

 

아마 이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김동리 류의 반공주의자들이 자기들의 권력으로 문단을 평가하려했던 경험이 뒷받침 되었으리라.

 

진보주의를 삶의 방식으로만 말한다면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다.

한 사람의 진보주의자가

미래의 삶을 선취하여 이 세상에서 벌써 행복하게 살지 않는다면

그는 그 미래의 삶에 대한 확신과 미래 세계의 건설 동력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그의 존재는 이 불행한 세계에 점처럼 찍혀 있는 행복의 해방구와 같다.(257)

 

폴 발레리를 빌자면 이렇다.

 

서둘지 마시라 그 사랑의 행위를

있음과 있지 않음의 기쁨을,

나는 그대를 기다리며 살아왔고

내 심장은 그대의 발걸음일 뿐이기에.(259)

 

늘 유쾌하게 세상을 향해 진보주의의 방식을 선보이던

노회찬은 그러나 갔다.

황지우가 간절히 노래했던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늘 분노하면서도 웃음을 선사하던 그를 잃고, 며칠만에 선생도 세상을 뜬다.

 

이 책을 유언으로 삼는다면...

선생은 남은 우리에게 사소한 부탁을 남기신 셈이다.

 

문학 안에는

우리와 같은 고민을 했던 인간들의 모습이 가득하다.

그것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위안을 얻으며

꿈꾸며 살아가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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