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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깨달음
조정래.홍세화.정혜신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5월
평점 :
나는 사진을 찍는 일도 찍히는 일도 낯설어한다. 아버지가 되고 나서, 아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인화하고 싶어하는 아내의 욕망을 채워주려 열심히 찍어대기도 했지만,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나니, 그 일도 시들하다.
아들 녀석은 기가 막히게 아내와 비슷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앨범 보기를 즐긴다는 것이다. 나도 어깨 너머로 같이 보노라면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사실 내 사진은 별로 없다. 사진에는 소리와 문맥을 잃고 그 찰나의 빛만이 남아있지만, 그 사진을 기억하는 우리 추억의 뇌 구조에는 그 당시의 냄새도, 소리도, 빗방울 떨어지는 분위기와 사람들간의 왁작한 분위기까지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날은 떠올리는 것은 그래서 단편적이고, 그러면서도 알싸한 아카시아꽃 냄새와 라일락 냄새가 한줄금 눈물과 함께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엊그제 연말 모임을 고깃집에서 가졌는데, 그 가게에 '고기의 육질을 좋게 했습니다.'하는 프래카드를 보고 '교육의 질을...'이라고 착각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했더니, 주인 아줌마가 한참을 허리를 펴지 못하고 웃어댔다. 시각이 자동화하는 세상은 이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좀 이상한 점이 많다. 인물과 사상사에서 이런 책을 찍어낸 것도 수상하다.
대표 작가로 조정래를 들어서 '조정래 외'라고 해 두고는,
표지에는 조정래, 장회익, 홍세화, 박홍규, 김진애, 고종석, 손석춘, 정혜신, 박노자 순으로 이름을 실어 두었다. 그러고는 실제 차례에서는 정혜신, 박노자, 고종석, 손석춘, 조정래, 장회익, 박홍규, 김진애, 홍세화의 순으로 실었다. 아, 인물과 사상사란 출판사에서 사람을 이렇게 취급하나 싶어서 실망이 컸다.
표지에 실린 이름은 맨 처음의 두 사람을 빼고는 연령순으로 실은 것이다. 장회익 교수에 비해 조정래가 상업성이 강하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어찌 그리 군대의 계급 순서대로(43년생, 38, 47, 52, 53, 59, 60, 63, 73년 생의 순이다. 세상 참 무섭다. 이름만 치면 생년이 튀어나오는 세상이니...) 이름을 배열할 생각을 했을까. 보통 이런 글의 저자는 가나다 순으로 하든지, 수록 순서대로 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을까?
내가 재미있게 읽은 글은 정혜신, 손석춘, 조정래, 박홍규의 글이다. 홍세화 선생은 좀 성의없게 쓴 듯하고, 고종석과 김진애는 암튼 좀 싫다. 그리고 <젊은 날의 깨달음>을 저술할 정도의 연배라면 앞의 세 분 정도가 아닐까 한다. 유명인이라지만, 73년 생에게 젊은 날의 깨달음이란 좀 생뚱맞고 잔인한 요구가 아닐까? 아직 한참 젊은데 말이다.
박홍규의 서문에 <저 도도한 패거리 문화가 만드는 억압과 불평등, 무사상과 무실천의 야만을 당당하게 갈아 엎어라. 자기 생각을 굽히거나 말과 행동이 다르게 사는 자를 스승은 커녕 벗으로도 삼지 말라. 젊은 벗이여, 굽히지 말라.>는 말을 실으신 것은 두고 두고 새기고 싶다. 내가 나이롱 대학원생 생활을 하면서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정혜신의 글은 참 재미있다. 자기 젊은 날은 정신과 의사라는 인식의 베이스캠프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나의 경우도 사범대학과 교사 생활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거부당한 사람들은 강렬하게 몰입한다. 그러나 병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몰입과 집중은 삶을 뒤틀리게 한다...는 이야기가 귀에 쟁쟁하다. 나의 읽기도 뭐, 이런 거 아닐까. 삶을 뒤틀리게 할는지도 모르는...
홍세화는 <인간성을 어느 시대나 그 자체로 가능성이고 희망이며 배수진>이라고 한다. 인간을 가리켜 <변해도 너무 변했다>고 하기도 하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고도 한다는데, 전자는 물질적으로 경제란 유일신을 볼 때 그렇고, 후자는 인간으로서의 품위, 존엄을 향유하고자 하는 존재로서의 욕구를 생각할 때 그렇다.
고종석은 민족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많은 분쟁들의 강력한 갈등원은 민족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의 양 날개에서 시작한다고. 한국 기독교의 종교적 열정도 기복, 불관용의 과도함이 문제라는 진단은 수긍할 만 하다. 우리가 인간으로 남으려 한다면 인종주의가 나쁘다는 것을 끊임없이 되뇌어야 한다는 자유주의자적 발언까지는 동의한다 치더라도, 스스로를 '소극적 영어 공용론자'라고 하는 것은, 개인주의를 말하면서 공용어론을 주장함은 자가당착이며, 영어를 쓰는 자, 가진 자로서의 오만에 불과한 무식한 발언이란 생각이 든다. 영어에 투자하는 돈은 졸라 많지만 현실적으로 실패한 영어 교육의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손석춘 논설위원은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소년 시절의 깨달음이 언론의 진보를 향한 발걸음을 떼게 했다.
조정래의 "인생이란 연습도 재공연도 할 수 없는 단 1회의 연극"이란 명제는 당연한 것이면서도 신선하다. 그의 삶이 정말 치열한 것이었기에 공감이 간다. 미련스러운 노력 말고 우리 인생을 책임질 수 있고, 빛을 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그의 말은 쉽게 무너지는 내 멱살을 잡에 일으킨다.
박노자는 한국과 러시아가 전지전능한 체제의 수레바퀴에 깔린 개인의 절망과 무력함이 무엇인지 몸으로 아는 공통점을 가진 사회라고 진단한다. 소련 붕괴로 미국, 외국이 만병통치약이란 생각에 빠진 그에게 한국의 경험은 <자유의 가면 뒤에 숨겨진 자본주의의 진면목을 직시>하게 만들어준 것이었단다. 완전한 자유가 실재하지 않아도 자유를 향해가는 <경계 벗어나기>의 경험을 준 한국 이야기는 한국이 낯설게 한다.
장회익은 '삶은 의문투성이인데, 실제로는 물음을 별로 던지지 않고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생명과 지구본'에 대한 이야기는 '돈오'와 '점수'를 생각하게 한다. 낱생명은 온생명 속에서 존속함을 찾아야 한다고.
다시 박홍규 교수의 이야기.
대학의 교수 사회란 일종의 사교클럽으로 사교성만이 교수를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이자 교수가 되는 첩경이다. 신규 교수를 뽑는 기준이 어리고 복종적이고 실력은 없고 진보적이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학문도 친일 친독재적이며, 치부를 감추고 폭로하는 자를 죽이기에 급급한 것이란다.
대학의 좌우명은 스승을 능멸한 비도덕의 엄금! 체제와 권위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비도덕적 능멸로 평가하여 그 삶을 절멸한 것이 20세기 한국의 비극이었다고 하는 말에는 한국 현대사를 점철한 비극에 원류를 보는 듯하여 가슴이 절절했다.
양심적 학문의 소수에 대한 관용이란 인권의 최소 미덕을 학벌 패거리를 본질로 하는 우리 학계가 인정하지 못하는 면을 비판한다.
김진애는 워커홀릭이고, 정치권에도 들어가다 실패했지만, 그의 미덕은 <건축은 자연에 대한 죄악, 되도록 죄를 덜 짓는 건축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나 <당신의 전공 분야에 쏟아지는 과장된 세례에 간단히 넘어가지 마라. 당신의 철학을 세워라>하는 이야기처럼 간혹 배울 것이 있다는 점이다.
멀티 인간, 실용 인간, 여자 인간, 진행형, 진화하는 인간으로서 강한 인간 김진애는 지나치게 가진자의 면모가 싫증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런 책에 자주 등장하게 한다.
이 책은 읽을 거리가 있다면 있고, 허섭하다면 허섭한 책이다. 만원을 투자하기엔 아깝고, 빌려는 볼 만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