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시선 229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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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보다 이 두 번째 시집이 내게 짝 달라 붙은 이유는 이 두 번째 시집이 훨씬 더 사물의 형상화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언어 유희에 지나는, 자기만의 경험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시를 싫어한다.

그런 시들을 읽다보면 내가 무식해 보여서 싫다.

김선우 시를 읽으면 거기엔 우리와 아주 가까운 사물들과, 직접 우리 몸을 훑어가며 그것들을 소재로 삼는다.

그러나, 김정환 류의 시에서 몸이 등장하고 몸섞기가 시도될 때, 나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여서 그랬는지, 그때가 더 순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선우가 땡그란 눈을 하고 바라다 본 세상 속의 몸들은 어차피 한 번 태어나고, 사그라드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세상은 이 '몸'에다가 온갖 추악스런 이미지들을 결부시켜 버렸다.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욕이 되고, 그 몸에서 나온 것들치고 아름답게 승화되는 것은 없었다.
그 몸이 늙어가고 죽는 것도 두려움의 하나였다. 어차피 태어나자 마자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이 생의 원리인 것을...

김선우는 이 '몸'을 새로이 감싸 안는다.

어머니의 폐경을 마지막, 죽음으로 인식하지 않고, <완경>이란 말로 삶의 사그라듦은 결국 인생의 완성이 아닌가 하는 새로운 시선을 보여 준다.

그의 눈이 바라보는 세상은 그래서 추악스럽지 않게, 그렇다고 그악스런 페미니즘을 입에 올리지도 않으면서, 그미는 자위를 함으로써 자연인이 되고, 자연에서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짐으로써 우주인이 되기도 한다.

이상이 69라는 다방을 운영했다지만, 69는 남녀의 신체가 거꾸로 엉겨붙은 껄쩍지근한 숫자의 조합이련만, 김선우가 노래하는 69는 신비롭고 오묘하고 신화 속의 할망들이 떠오르는 것은 역시 그미의 언어에 대한 통찰이 갖는 힘이 아닐까? 추하지 않은 인간의 몸을 있는 그대로 보는 시선을 배울 일이다.

송장 자세로 삶을 건너는 고즈넉한 휴식을 <내 죽음의 형식>으로 바라는 그미.
나무에게서 삶과 자연의 원리를 자연스레 도출하는 탁월한 시선을 거두는 농부.

69- 삼신할미가 노는 방, 이런 말투가 김선우를 읽게 만드는 힘일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고향집 안방에서 한낮을 백년처럼 뒹구는데 까츨하고 굽실한 희끗한 터럭 하나, 집어들고 햇살 속에 이윽히 뜯어보니 이것은 분명 그곳의 터억 어머니의 것일까 아버지의 것일까 오래 전 돌아간 조부모의 그것이 장롱 밑에 숨었다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햇볕 쪼이러 시남시남 나와본 걸까 희끗한 터럭 집어들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사이에 마음이 뜨끈하게 여울져 오고 별안간 이 오래된 삼신할미 같은 방이 쌔근쌔근 더운 숨을 몰아쉬기 시작하는 거라.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방이 무덤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르더니만 사방이 69 천지인거라 방구들과 천장의 69, 전등과 전등갓의 69, 문틀과 문의 69, 한 시와 두 시의 69, 이불과 요의 69, 자음과 모음의 69, 두 시와 세 시의 69, 얼룩들의 69, 얼룩이 얼룩을 낳고 얼룩 속에 제 몸을 비벼넣으면서, 쥐오줌과 곰팡이꽃의 69, 숟가락과 국그릇의 69, 주춧돌과 두꺼비집의 69, 옛날 옛적 산이었던 이 터와 지붕 얹힌 것들의 69, 죽은 것과 산 것들의 69, 어머니 태 속의 나와 어머니의 69

  그러고는 이 삼신할미 같은 방이 맨 나중으로 펼쳐 보여준 것은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69였는데, 흰머리 성성한 어머니가 외할머니 젖을 빨듯, 시든 아버지가 할머니의 젖을 빨듯, 이상하게도 자분자분 애틋한 소리가 온 방에 가득해져오는 거라 방구들이 천장에게, 모서리가 벽에게, 한 시가 두 시에게, 삶이 죽음에게 젖을 물리며 늙은 방이 쌔근쌔근 숨을 쉬고 있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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