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인권은 과분하지 않은가."
친구가 제게 한 말입니다. 현실을 묻는데 당위로 답할 순 없는 노릇이죠. 말이나 글로 된멀끔한 당위는 더러 식상하고, 모욕적일만큼 공허하기도 합니다. 저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친구의 말이 질문이었다면, 저는 아직 답을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것이 추궁이었다면, 솔직히 저는 맞장구치고 싶을 때가 잦습니다. 형사의 집요한 추궁에 마침내 무너지는 용의자처럼 말이죠. 냉소와 염세, 악마의 유혹이라고도 한다는 달콤한 포기. - P6
어쩌면 저 질문은, 말년의 마더 테레사가 신의 존재를 의심했던것처럼, 이 책에 엮인 이들이 평생 힘겹게 품었던 질문, 그들이 답해야 할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책 속의 ‘당신‘들은 위인전의 주인공들과 달리 세상으로부터 부단히 외면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 실패했거나 기대한 바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한 이들입니다. - P6
대체로 늘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듯, 사필귀정이나 인과응보의미끈한 논리는 당위의 멀끔함만큼이나 믿음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 책의 글들은 저 추궁에 투항하지않기위해제 나름 아둥거린 작은 흔적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022년 11월최윤필 - P7
도티 프레이저 여성 최초 스쿠버 강사가 헤쳐온 길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 토박이 도티 프레이저 Dottie Frazier는2019년 만 7세에 자신의 애마 ‘가와사키‘ 모터바이크를 팔았다. 차량면허관리국이 그에게 면허증을 갱신해주지 않아서였다. 십대 말부터 바이크를 몰고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멕시코 국경 너머까지 누비고 다닌 그였다. 나이 때문에 겪는 짜증스러운 일들이 못마땅했던 그는 구십대에 접어든 이후 "나를 평범한 노파로 여긴다면 그게 당신의 첫번째 실수가 될 것"이란 문구를 새긴 티셔츠를 보란 듯 입고 다니곤 했다. 물론 그를 아는 자라면, 롱비치 해양 레포츠의 산 역사인 그에게 그런 실수를 저지를 리 없었다. 프레이저는 걸음마와 함께 수영을 익혀 대여섯 살 무렵부터 스킨다이빙을 시작했고, 고교 시절엔 눈뜨자마자 강아지를 안고한바탕 서핑을 한 뒤에야 등교하는 게 그의 일과였다. 그는 롱비치 바이크 서클의 유일한 여성 정회원이었고, 롱비치 최초 다이버 클럽 ‘롱비치 넵튠스Long Beach Neptunes‘의 1940년 창립 멤버였다. - P17
그가 고집을 부린 덕분에 롱비치 작살낚시대회 여성 부문이 만들어졌고 그는 꽤 오래 혼자 출전해 우승을 독차지했다. 무엇보다 그는 미국에서 최초로 여성 스쿠버다이버 강사 자격증을 획득했고, 여성으로는 처음 다이버 클럽을 열어 운영했으며, 여성용 다이빙 슈트를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 보급하면서미 해군과도 협업한 개척자였다. 한마디로 그는 다이버들의 전설이었다. 다이빙 전문지 〈스쿠버뉴스scubanews>의 평가처럼, 그의 진짜놀라운 점은 ‘무엇을 해냈느냐가 아니라 언제 해냈느냐‘를 살펴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는 여자 수영복도 없던 1920년대에 수영을 시작했고, 여성 직업이랄 게 뻔하던 1940년 18세 때부터 프리다이빙 강사로 돈을 벌었다. 스쿠버다이빙이 갓 등장하던 무렵당국과 싸우다시피 해서 강사 자격증을 땄고, 여자라서 못 미더워하는 남성 수강생들을 가르쳤다. 파도와 조류, 수압 못지않게 거칠고 억센 젠더 차별의 장애물들과 부딪치며 여성 다이버의 세계를 연 파이터, 도티 프레이가 2022년 2월 8일 별세했다. 향년 만 99세. - P18
1950년대 초 등장한 스쿠버다이빙은 남성 레포츠였다. 장비며 옷이며 모두 남성 체형에 맞춰 제작됐다. 여성에겐 너무 무겁고 컸다. 고무 소재 슈트는 비싼 탓에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고, 1950년대 말 등장한 네오프렌 소재의 웨트슈트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여성들의 몸에 맞지 않았다. 프레이저보다 2년 뒤인1957년 스쿠버 강사 자격증을 딴 미국 ‘여성 다이버 명예의 전당‘ 회원 바버라 앨런Barbara Allen도 당시 상하의로 나뉜 남성 다이빙복을 입다가 나중에야 맞춤복을 입었다. 1980년대 여성용 웨트슈트가 출시됐지만, 역시 명예의 전당 멤버인 로레인 새들러Lorraine Sadler에 따르면 "바비인형 몸매의 여성이나 입을 수 있는옷"이었다. 신축성이 가미된 네오프렌 원단 슈트가 출시된 것은1980년대 말부터였다. 1970년대 말 등장한 방수 드라이슈트 역시여성용 기성복은 1995년에야 출시됐다. 새들러는 옷이 너무 커서몸에 덕트테이프를 친친 감곤 했다고 말했다. 부력을 조절해 원하는 수심에 머물 수 있게 돕는 다이빙 장비인 부력 조절기도 여성용은 1988년에야 처음 출시됐다. 초창기 여성 다이버들은 장비의 허들까지 넘어야 했다. - P21
그는 배나 자동차 변속기를 직접 교체할 만큼 기계 수리에도 능했다. 그가 바버라 앨런을 태우고 샌타카탈리나섬으로 다이빙투어를 갔다가 보트 엔진이 멎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앨런은 "배를 견인하려고 다가온 해안경비대 순시선에 프레이저가 손사래치더니 ‘이걸 못 고치면 내가 아니지‘라고 하곤 공구 상자를 들고 와 기어코 고치더라"고 회고했다. 프레이저는 스키와 수상스키에도 능했고, 라켓볼과 당구는 선수급이었다. 하지만 그의 직업은 다이빙 강사였고 ‘상업 어부commercial fisher‘였다. 그에게 다이빙은 대다수의 초창기 여성 다이버들과 달리 놀이에 앞서 생업이었다. 스키 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수술을 받은 뒤에도 다이빙복에 지퍼를 달아 입었고, 작살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노리고 달려든 대형 바다표범에게 부딪쳐 갈비뼈 네 대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샌타카탈리나섬에선 달려드는맷돼지를 작살총으로 제압한 적도 있었고, 바하멕시코Baja Mexico에선 거대한 백상아리와 맞닥뜨린 적도 있었다. 그는 호기심을보이던 백상아리를 향해 정면으로 유영해 다가가자 상어꽁무니를 빼더라고 했다. - P22
말년의 프레이저는 롱비치에 위치한 자신의 집 뜰을 텃밭으로가꾸는 일에 몰두했다. 뜰에는 꽃이 아니라 콩, 토마토, 베리, 비트, 아티초크, 브로콜리 등 식용 채소와 유실수로 가득했다. 바다에서처럼 그는 마당에서도 실용적 가치를 함께 추구했다. 지역소방대장을 지내고 은퇴한 아들 대니 프레이저 Danny Frazier는 "어머니는 자급자족을 원했다……. 심지어 밭에 뿌릴 물도 커다란통에 빗물을 받아썼다"고 말했다. - P23
그는 아버지에 이어 롱비치 운영위원으로 말년까지 일했고, 만93세였던 2016년 샌버나디노산San Bernardino Mt. 집라인 최고령도전 기록을 세웠다. 2008년 넘어져 경미한 뇌진탕을 입고도 "나를 물러서게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호언했다는 그다. 2020년 3월그를 인터뷰한 한 기자에게 만 99세에 별세한 아버지의 수명 기록도 넘어서겠다며 "만 100세 생일파티에 초대할 테니 시간 비워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2019년 미국 다이빙협회 개척자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여성 다이버 명예의 전당에 합류했다. 그와 같은 해 명예의 전당에 든 다이버 겸 작가진 B. 슬리퍼Jeanne B. Sleeper는 "프레이저가 앞서 파도를 부수며 길을 터준 덕에 우리는 그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 산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 P23
콘라트 슈테펜 사라지는 빙하의 최초 목격자
지구온난화는 위기가 아니라 축복(빙하기 지연설)이며 인간 탓이 아니라 자연현상의 일부(자연 주기설)라는 끈질긴 가설들이47 년 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해양학자 윌리스 브로커WallaceBroecker에 의해 사실상 처음, 과학적으로 부정됐다. 브로커는 ‘기후 화석‘ 중 하나인 심해퇴적물을 분석한 1975년 <사이언스> 논문에서 기후변화의 원인과 충격적 추이를 ‘데이터‘로 처음 입증했다. 기후 연구는 그를 기점으로 옳은 방향을 찾았고 표나게다급해졌다. 1970년대 말 무렵엔 한 해 평균 20~30 편의 주목할만한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기후 위기의 실질적 분수령은 1980년대 말 이후의 냉전 종식이라 해야 한다. 미국물리학회 과학사센터장 스펜서 워트Spencer Weart의 말처럼, 냉전기 두 진영은 ‘상대의 핵탄두 숫자에더듬이를 대느라 바빠 50년 뒤 세상에 대비할 여유도 의지도‘ 없었다. 냉전 이후에야 기후 위기 연구 예산이 실질적으로 책정됐다. - P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