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귄


<뉴욕 타임스>에 프란스 드 발이 쓴 어떤 글에 보노보 원숭이를 간지럽히면 완전히 인간과 같은 반응, 낄낄거리고 몸을 뒤로 빼지만 간지러움을 더 원하기도 하는 등등의 반응이 나온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놀랍고도 절묘한 글이죠. 많은 과학자들이 다른 동물들과 우리의 관계를 객관화하고 싶어 하기에,
우리는 그 어린 유인원이 딱 어린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말을할 수가 없어요. 아니다. 그 유인원은 유인원의 방식으로 반응할 뿐이다, 우린 그에 대해 결코 인간의 표현을 쓰면 안되고, 함부로 의인화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드 발이지적하다시피, 유대감에 대한 공포도 있어요. 우린 유인원이나 생쥐에게 동질감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된다는 거죠. 하지만 동질감이 없다면 시가 어디 있겠어요?










때늦게』의 서문 중에서


시는 나무나 강이 무엇인지를 말하려고 시도할 수있는 인간 언어다. 즉, 인간의 능력으로 그 대상에
‘대해서‘ 말하는 동시에 그 대상을 위해서 말한다는뜻이다. 시는 개별 인간의 관계를 어떤 대상(돌멩이든 강이든 나무든)과 관련지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도있고, 아니면 그저 대상을 최대한 진실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과학은 외부에서 정확하게 묘사하고, 시는 내부에서 정확하게 묘사한다. 과학은 밖으로 풀어내어 해설하고, 시는 안으로 풀어내어 함축한다. 둘 다 묘사 대상을 기린다. 우리의 무지나 무책임을 알려주지 못하는 ‘정보‘만 끝없이 쌓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과학의 언어와 시의 언어 둘 다 필요하다.

네이먼


작가님이 인용하신 메리 자코버스의 말 같네요. 자코버스는 "시의 절제된 언어는 아마도 우리가 그런 것들, 움직이지 않는 물체의 고요한 목소리나, 나무의 지각 없는 서 있음 같은것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일 것"이며 어쩌면이 절제된 언어가, 우리가 유대감이나 사색으로 나아가도록돕는 기술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고 말하죠. - P65

르귄


우리가 언어를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기술은 사실 도구와 연관되어 있죠. 언어는 우리가 발산하는 무엇이고, 특정시기에 배우지 않으면 안 돼요. 언어는 기이해요. - P65

르 귄


<뉴욕 타임스>에 프란스 드 발이 쓴 어떤 글에 보노보 원숭이를 간지럽히면 완전히 인간과 같은 반응, 낄낄거리고 몸을 뒤로 빼지만 간지러움을 더 원하기도 하는 등등의 반응이 나온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놀랍고도 절묘한 글이죠. 많은 과학자들이 다른 동물들과 우리의 관계를 객관화하고 싶어 하기에,
우리는 그 어린 유인원이 딱 어린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말을할 수가 없어요. 아니다. 그 유인원은 유인원의 방식으로 반응할 뿐이다, 우린 그에 대해 결코 인간의 표현을 쓰면 안되고, 함부로 의인화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드 발이지적하다시피, 유대감에 대한 공포도 있어요. 우린 유인원이나 생쥐에게 동질감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된다는 거죠. 하지만 동질감이 없다면 시가 어디 있겠어요? - P67

네이먼


「맥코이 크리크에서의 사색Contemplation at McCoy Creek」이라는시에서는 이런 우주의 주관적 해석과 바깥으로 손 뻗기라는문제를 아주 잘 다루셨어요.


르 귄


이건 철학 시 같은 것이니, 그 시에 대해 한마디 할게요. 전도서관이 없는 하니 카운티 스틴스산에 가서 사색contemplation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단어에는 신전temple이 들어가 있고, 맨 앞에 붙은 con은 ‘함께‘라는뜻이죠. 그래서 거기서부터 시작을 했고ㅡ이게 그 시의 중반을 설명해줄 텐데 그때 묵던 집에 책이 한 권 있었거든요.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는데, 사색이라는 말에 아주 훌륭한 에 - P67

세이가 붙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 시는 배움의 경험을 담은셈이죠.



네어먼


시 앞부분에 "단어 안의 의미를 찾다가"라는 구절을 보니 미국 시협회와의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던데요. 협회에서 운영하는 잡지에 첫사랑First Loves」이라는 칼럼이 있었는데, 시인들에게 시를 처음 만난 경험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는 코너였죠. 작가님은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의 이야기시 모음집 고대 로마의 노래 Lays of Ancient Rome」에 대해, 또 스윈번의 시들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 이런 시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시로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지만, 또한 이야기는 때로 단어 자체의 의미를 넘어서며, 개별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단어들이 빚어내는 박자와 음악에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죠. 여기에 대해 조금 더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 P71

르 귄


더 깊은 의미란 시가 음악에 가까워지는 지점이에요. 그 의미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들 수는 없어요. 의미는 거기에분명히 있고, 읽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요. 그건 리듬과 박자이고 그걸 전달하는 소리가 빚는 음악이죠. 이건 너무나 신비로운 일이고 그래야 마땅해요. - P71

맥코이 크리크에서의 사색



단어 안의 의미를 찾다가, 나는 추측했다
그곳 그 성스러운 장소 안에
신전이 있음을 온전히 목격하고,
따라서 목격된 바의 제단이 된 신전.

개울 옆 그늘 속에서 나는 사색한다
이번 초여름 높은 곳에서 흘러온 큰물이
어떻게 물길을 바꿨는지에 대해.
개울 속 커다란 바위 네개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버드나무들은 무성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범람한 물속에 뿌리를 내리기도 하고 뿌리 뽑히기도 했다.
계곡 위 환한 빛 속에서는
까마귀 한 마리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다
그림자 날개가 까마귀처럼 고요히
벼랑 끝 바위를 가로지른다. 사색은
나에게 불연속이라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책 안을 보았을 때 나는 발견했다

시간이란 관측되고 구별된 신전-시간 자체와 공간이라는 것을一
네 개로 나뉜 하늘, 벽에 둘러싸인 땅에
성스러운 장소를 만들기 위한 신전.

연속성에 합류하기 위해, 마음은
물을 따라가고, 새들을 좇고,
움직이지 않은 바위를, 절묘한 비행을 관찰한다.
느리게, 침묵 속에서, 말없이,
장소와 시간의 제단이 올라간다.
자아는 사라져, 찬미를 위한 제물이 되고,
찬미 자체도 적막 속에 빠져든다.

네이먼


지난번에 대화를 나눌 때 작가님은 버지니아 울프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알기로 울프는 시를 별로쓰지 않았어요. 작가님이 어렸을 때 시에 대해서나 소리의 의미에 대해서 배운 바가, 산문을 쓸 때 버지니아 울프가 소리와 맺은 관계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설명하셨던 바와 비슷한 현상이라고 생각하세요?



르 귄


산문의 리듬 속 소리에 대해 말할 때는 시와 많이 달라요. 어떤 면에서는 훨씬 거칠거든요. 산문 작품의 리듬은 아주 긴박자죠. 물론 문장에도 문장의 리듬이 있어요. 울프는 그 점을 강렬하게 의식한 작가였어요. 어떻게 리듬이 자신에게 책을 선사하는지에 대해 울프가 쓴 글도 있는데, 휴,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사실상 표현할 어휘가 없는 경험적인 뭔가예요. - P72

적절한 단어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것도 음악을 말하는 것과 비슷해요. 음악에 대해 아무리 떠들어봐야 그냥 연주를 해봐야 하는 거죠. 어떤 사람은 듣고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지못할 수도 있고요.


네이먼


성인이 되어서 사랑하게 된 시인으로는 누가 있나요? 소중하게 여기는 시인은요? - P73

르 귄


릴케를 아주 윗자리에 둬야겠네요. 도움이 필요했던 어느 여름에 매킨타이어가 번역한 『두이노의 비가』번역본을 읽었어요. 그때 제 상태가 아주 나빴는데, 그 시집에 실린 비가 몇편이 저를 어둠에서 끌어낸 것 같다고 느껴요. 적어도 버텨내게 해준 건 확실하죠. 전 독일어를 몰라요. 그러니까 릴케와괴테는 번역으로 마주한 다음에 왔다 갔다 하면서 짚어봐야하죠. 보통은 저만의 형편없는 번역을 해보려고 하는데, 그러면 사전을 들고 독일어 단어를 파고들 수 있어요. 시를 읽는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지만, 단어를 하나씩 짚어가며 읽는다면, 독일어 명사를 하나도 몰라서 모조리 찾아봐야 하고 동사는 수수께끼 같은 데다 제자리에 놓여 있지도 않으면, (웃음)겨우 다 읽었을 때는 그 시를 제대로 알게 돼요. 자기만의 번역이 만들어지는 거죠. 그래서 제가 아는 언어는 물론이고 잘모르는 언어도 번역하기를 좋아하는 거예요. 노자의 책이 그런 경우였죠. - P73

Muro


Muro fácil y extraordinario,
muro sin peso y sin color:
un poco de aire en el aire,

Pasan los pájaros de un sesgo,
pasa el columpio de la luz,
pasa el filo de los inviernos
como el resuello del verano;
pasan las hojas en las ráfagas
y las sombras incorporadas.

¡ Pero no pasan los alientos,
pero el brazo no va a los brazos
y el pecho al pecho nunca alcanza!




간단하고, 비범한 벽,
무게도 없고, 색채도 없는,
허공에 뜬 공기 같은 벽.

새들은 그 벽을 비스듬히 통과한다;
빛의 흔들거림도,
겨울의 칼날도,
지나가는 여름의 한숨도.
폭풍에 불려 온 나뭇잎들은 벽을 건너
그림자를 그릴 수 있다.

하지만 숨결은 통과하지 못하고,
팔은 뻗어오는 팔에 닿지 못하고,
숨결과 숨결은 영영 만나지 못한다.

르 귄


독재자들은 언제나 시인들을 두려워하잖아요. 시인은 정치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여기는 많은 미국인에게는 이상해 보이겠지만, 남아메리카나 다른 독재 치하의 나라에서는 사실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요. - P83

논픽션에 대하여


지난 10년간 그는 중요해진 유명 인사이자 사상가인 ‘이 세상의‘ 어슐러였다. 같은 기간 동안 어슐러는 구글이 저작권을 무시하고 책을 디지털화할 수 있게 합의한 작가조합에 항의하며 조합에서 공개적으로 탈퇴했다. 또한 많은 이가 전미도서재단 역사상 가장 맹렬한 연설로 꼽을발언도 했는데, 미국 문학에 대한 두드러진 공헌을 인정하는 상을 받으면서 그 기회에 아마존 같은 곳이 책과 저자들을 점점 더 상업화하고상품화하는 현실을 맹공격했다. 어슐러는 소위 포스트 팩추얼 시대무엇이 사실인지 중요하지 않게 된 시대에 사실이란 무슨 의미인가에서부터,  - P85

정부로부터 ‘해방‘하겠다는 이유로 민병대가 오리건주 남동부의 야생동물보호구역을 점령하는 시절에 과연 ‘공유지‘란 무슨 의미인가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많은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전국적 담론에서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어슐러는 작가로서 초기에 겪은 어려움을 나누고, 어느 웹사이트 포럼에서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했으며,
블로그에 고양이 파드의 ‘회고록‘을 연재하면서 그의 삶을 다른 식으로도 보게 해줬다.
그러니 우리의 세 번째 대화로 논픽션 쓰기를 이야기하고자 라디오 방 - P85

송국이 아니라 어슐러의 집에서 만난 것도 어울리는 일이었다. 우연히도 어슐러의 삶과 작가 경력에 대한 다큐멘터리 촬영을 돕고 있었던KBOO의 오후 뉴스 코디네이터 에린이 우리 대화를 녹음해주겠다고 자원했다. 나는 예린과 함께 그 집으로 갔고, 우리는 야외 녹음으로서는최상의 품질이 나오는 안락하고 책이 가득한 2층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세상이 계속 끼어들기는 했다. 우리는 트럭이 가까이 지나갈 때도 멈추고, 옆 침실 안의 제일 좋아하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이게다 무슨 소란인가 확인하러 나온 파드에게 인사하느라고도 멈췄다.
내가 그랬듯 독자들도 어슐러가 소설과 시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고,
선언과 주장의 세계에서는 좀 더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어둠의 왼손」에서 어슐러는 "어떤 질문이 대답할 수 없는 것인지 배우고,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  - P86

이것이야말로 압박과 어둠의 시절에 꼭 필요한 기술이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세이, 문학비평, 강연에서-과학과 환경에 대해서든, 구글과 아마존에 대해서든, 페미니즘과 문학의 정전에 대해서든 자신의 관점을 전달하는 이영역에서 어슐러는 목소리가 없는 이들을 변호하고, 모든 예술가, 아니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답 없는 존재를 대변해 말하는 것 같다.
논픽션에 대한 이 대화를 끝내면서 나는 소설, 시, 논픽션이라는 세 장르 모두에 이렇게 깊은 역사를 지닌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말했다. 지금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특별했는지도. 사실은 달리 누구와 이런 일을 또 할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대화를 책으로 만들어야겠는데요!" 어슐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하여 이 책이 나왔다. 어슐러 K. 르 귄의 사색이 우리의 현실이 되고, 세상에 나온 오브제가 되어 우리 손안에 펼쳐졌다. - P86

르 귄


우선 제가 읽을 수 있는 글이요. 나이가 많아서이기도 할 거예요. 제게는 서사가 필요한데, 사실 언제나 서사가 필요했어요. 추상적인 생각은 잘 읽지 못해요. 그러니까 자서전과 전기, 지질학 같은 과학을 읽는 경향이 있죠. 역사 속의 이야기를 전하거나, 역사 자체를 말하는 논픽션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글은 잘 읽지 못해요. 특히 철학에는 애를 먹어요. 대학 신입생 때 철학 수업을 들었는데요. 그때는 필수로 들어야했거든요. 저도 철학이 좋기는 한데 도무지 머리에 남지가 않더라고요. 도저히 머리에 담아둘 수가 없어요. 반드시 이야기가 있어야 해요. 우화라면 저도 기억하거든요. - P90

네이먼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서문에서도 지금 하신 말씀을 넌지시 언급하셨죠. 소설 쓰기와 시 쓰기는 자연스럽고, 쓰고 싶기도 하며, 쓰면서 충족감을 느끼고 또 그 글의정직성과 품질을 판단할 수 있다고 느끼지만 논픽션은 그럴수가 없다고요. 논픽션 쓰기는 업무처럼 느껴지는 데다, 소설과 달리 글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 훨씬 잘 아는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거라고요. 그런 심한 불안을 느낀다면 어떻게 든든한 토대를 찾고, 또 에세이 한 편이 제대로 완성되었는지 그 여부를 아시나요? - P90

르귄


시작하기가 힘들어요. 끝도 없이 첫 페이지를 구겨서 버리다가 겨우 시동을 걸 수 있게 되죠. 언제 끝났는지 아느냐는 문제는 가끔 정말 어려운데요. 몇 년 전에 여자 어부의 딸TheFisherwoman‘s Daughter」이라는 글을 썼는데, 그 글을 들고 강연에 나갈 때마다 청중들이 피드백을 어찌나 많이 주는지, 매번 글을 다시 써야 했어요. 결국 전 그냥 "그만! 이젠 다시 쓰기를 그만해야 해!"라고 말하고 그대로 출간했어요. 하지만그건 어떤 글을 그 자체로 완성한 게 아니라, 그저 어느 선에서 멈춰야 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전 의견을 담아내는 글이라면 어느 경우에나 글 끝에 꼭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느껴요. - P91

네이먼


그 책에서는 특히 예술 작품 속에서 산다는 것」이라는 에세이를 가장 좋아하는 글로 꼽으시는데요. 드물게 누구의 의뢰없이 쓰신 글이기도 하죠. 순전히 작가님이 쓰고 싶어서 쓰신글이에요. 이 글을 쓰는 과정에 대해서 무척 흥미로운 말씀을하셨는데요. "나는 소설을 쓸 때처럼 생각의 직접적인 수단이나 형식으로서 글을 이용할 수 있을 때라야, 산문을 제대로이용하고 있다고 느낀다. 내가 알거나 믿는 바를 전하는 수단으로서도 아니고, 메시지 전달의 수단으로서가 아니고, 쓰기 전까지는 몰랐던 뭔가를 초래하는 탐구이자 발견의 여행이 될 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에세이를 구성하실 때의탐구 과정에 대해 조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독자로서 그글의 즐거움 하나는 작가님과 같이 탐구하는 느낌, 작가님과같이 발견하는 느낌이었다는 걸 알기에 하는 말입니다. - P91

르 귄


아마 그 글은 저에게 자서전에 가장 가까운 글일 거예요. 제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제가 열일곱 살에 떠나기는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다시 찾던 집으로 돌아가죠. 그러니 전 한참을 돌이켜 생각했어요. 그 글은 늙은 여자가 어린시절을 탐구하는 글이기도 해요. 내가 살았던 곳, 단순하게는집이면서도 어린 나에게는 우주였던 그곳이 어땠더라? 전 그곳이 어땠는지, 그곳의 의미와 내게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그곳이 어떻게 저를 빚어냈는지 탐구해보려고 했어요. 그 집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는 걸 아니까요. 그리고 또 제가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던 집에 대해 쓰는 것 자체가 즐겁기도 했어요. 그 집에 다시 가서 그 집을 생각하는 즐거움이요. - P92

[예술 작품 속에서 산다는 것] 중에서


우리의 메이벡 주택을 어떤 소설에 비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설에는 어둠과 광휘가 담겨있을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정직하고 대담하고 독창적인 구조에서, 영혼과 정신의 상냥함과 관대함에서 솟아날 것이며 또한 환상적이고 기이한 요소들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소설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나의 생각 중 많은 부분이 결국 그 집에 살았던 경험으로 배운 게 아닌가 싶어진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평생 단어로 그 집을 다시 지으려 애써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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