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던 선숙은 사람들의 시선이 연달아 자신에게 꽂히고 나서야 마스크를 안 쓴 걸 깨달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현관문 옆 고리에 걸린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까먹지 말라고 문 옆에걸어두고서도 그냥 집을 나서기를 수차례...... 이놈의 마스크는 써도 써도 적응이 안 됐다. 코로나 시대 역시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던데, 이번에는 이 종족도 어쩔 수 없는지 백신도 영 신통치 않아 보였고 치료제도 지지부진이었다. 변이 바이러스인지 뭔지는 해괴한 이름을 달고 계속 튀어나왔고, 돌파 감염이니 뭐니 해서 맞은 백신을 또 맞으라고 했다. 그것도 이번에는 다른 상표의 백신을 맞아야 할지 모른다는데, 부작용도 있다고 하고 노인들에게 - P7
위험하다고도 하는 둥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바이러스가 요동치는 세상에서 선숙 같은 소시민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집에서 편의점까지 500미터 남짓 거리를 걷는데도 숨 가빴다. 한여름 열기에 마스크로 호흡까지 힘들어지니 살집이 있는 선숙으로선 밖에 나오는 일 자체가 불편했다. 선숙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산책할 수 있는 예삐와 까미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밤까지 일해야 해서 녀석들 산책이나 시킬 수 있을는지 걱정이 들었다. - P8
아들은 이제 OTT 시대라면서 넷플릭스라는 돈 내고 보는 채널이 있다고 했다. 자기 회사는 그곳에 작품을 걸 거라고 했다. 선숙은 용어부터 이해가 잘 안 됐지만 아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설명해주는 모습이 그저 흡족했다. 자랑하고 싶은 자기 일을 하게 된아들이 대견했고, 그걸 엄마에게 표현해준다는 게 고마웠다. 불과1년 반 동안 일어난 두 사람 사이의 변화였다. 선숙은 이제 아들을 닦달하지 않는다. 안정적인 고시 같은 걸 보라고도 안 한다. 결혼하라는 말도 안 하기로 했다. 아들 세대 앞에놓인 세상 형편이 자신이 젊을 때의 기준과 다르다는 걸, 아들의 설명을 듣고 인정한 뒤에 일어난 변화였다. 자신과 분리되려는 아들의 모습을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서로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거리를 지키게 되었다. - P17
평소 같았으면 선숙은 거침없이 생각을 털어놓았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신중해야 했다. 막무가내. 어찌 보면 자신의 지난 삶에서 선숙이 일을 해결하는방식이었다. 남편과 아들을 대할 때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있고, 그때는 ‘나‘가 아니라 관찰자의시점으로 자신의 사안을 바라봐야 한다고 배웠다. 누구에게? 영숙언니에게 아들과 대화의 물꼬를 튼 시점에서 얼마 안 지나 다시 성질이 끓어오르던 찰나, 그녀의 주의 깊은 조언으로 아들에게 막무가내 따지는 버릇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후 선숙은 영숙 언니에게 고맙다고 밥을 샀고, 당시 유행하던마라탕이란 걸 먹으며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조언 덕에 아들과 관계가 한결 나아졌다는 말에 영숙 언니는 그런데 그게 도대체 자기문제에는 안 먹히는 게 수수께끼라며 풀이 죽었다. - P27
취준생 3년 차에 접어드는 소진은 그동안 수많은 면접에서 떨어졌다. 서른 번이 넘고 나서는 더 이상 낙방 횟수를 세는 걸 포기했다. 학점도 스펙도 나쁘지 않았다. 영어 성적은 최상급이었고 프리토킹도 가능했다. 하지만 구직 전선에서는 점점 후퇴해 밀려나고있었다. 1년 차 때는 면접에서 많이 떨어졌다. 2년 차에는 서류 전형에서도 많이 떨어졌다. 3년 차인 지금은 어디서부터 얼마나 떨어질지가늠도 안 됐다. 딱지가 앉은 거 같아도 늘 쓰라렸다. 그렇게 떨어지고 떨어지다 보면 서울에서도 떨어져 나가겠지. 멀리 더 멀리 떨어져 나가 목포의 고향 동네로 돌아가겠지. 어쩌면 소진은 그날이 올 때를 기다리며 무모한 도전을 이어가는 듯했다. 그렇게 완전연소 하고 나면 귀향해도 후회가 없을 거란명분, 그 명분이 소진을 서울에서 버티게 하는 이상한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었다. - P48
근배 씨가 다시 자갈치를 아작 씹었다. 소진은 연갈색 음료를 마저 비웠다. 그런 다음 꾸벅 인사하고 몸을 돌려 출입문으로 향했다. "가물치 씨!" 근배 씨의 하이 톤 외침에 소진은 문을 잡고서야 했다. "이제 소진 씨 내가 가물치라고 부를 겁니다. 힘센 가물치 씨. 그러니까 호구로 살지 말고 포식자로 살라고요. 알았죠?" 소진은 대답 대신 유리문을 있는 힘껏 열어젖혔다. 사우나 같은열대야의 밤으로 걸어 나갔다. 열기와 객기를 연료로 삼고 싶었다. 그러자 누구 하나 함부로 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오기가 끓어올랐다. 진짜 가물치가 된 듯했고 자정의 어둑한 골목길도, 남영역 굴다리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아빠가 일하다 돌아가신 낯선 이 도시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 P78
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가게를 마친 뒤 편의점 야외테이블에 앉아 봄바람에 묻은 벚꽃 내음을 맡으며 늦게까지 소맥을 기울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날이 더워지면서 확진자가 늘어나더니, 가게도 편의점도 밤 열시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놈의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 조치로 인해 가뜩이나 외로운 최 사장은 더욱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죽을 맛이다. 지난해 봄, 코로나가 터졌을 때만 해도 연말쯤 되면 어떻게든 잡히겠지 했다. 미국이고 영국이고 선진국들이 백신도 개발하고 치료제도 개발할 텐데, 그리고 그걸로 돈을 벌려 할 테니 머지않아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2020년이 끝날 때까지 역병은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심해졌고, 영업 제한과 거리두기는 단계를 바꿔가며 점점 정교해졌다. - P83
손님들은 어떤가? 10년 전 단골 어르신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좀처럼 못 오시고, 주 고객이던 인근 대학 교수와 교직원들은 새로생긴 맛집들로 발걸음을 옮긴 지 오래다. 무엇보다 이 상권의 메인소비자인 대학생들에게 소고기는 비싼 음식인지라 외면 받고 있었다. 아무튼 가게라는 건 돈만 버는 게 아니라 삶의 터전이자 직원과 손님들 모두 행복한 곳이 되어야 하는데, 이제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진 이곳은 망해가는 가게의 특징들만 독버섯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고기 장사로 30년간 IMF, 사스, 구제역, 광우병 소고기 파동, 메르스 등 수많은 고비를 넘긴 최 사장이었지만, 이 전 지구적 재난앞에서는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 P88
세상은 불공평하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아빠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빠는 비 오는 날만 아니면 늘 현장에 나가지만 버는 돈은 그리 많지 않다. 하청 받는 오야지 밑에서 일하는 잡부여서 그렇다고하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빠는 늘 그 사람들 욕을 한다. 치사하고 더럽다고. 그리고 뒤이어 꼭 이 말이 이어진다. 민규, 너 인마 공부 열심히 해. 공부 못하면 나처럼 여름에 더운 데서 일하고 겨울에 추운 데서 일하는 거야. 세상은 진짜 불공평하다. 환경미화원 엄마를 봐도 역시 알 수 있다. 엄마는 용역회사 소속으로 파견 가서 일하는데, 정작 일하는 엄마와 동료 미화원보다 용역 사장이랑 직원들이 돈을 훨씬 더 많이번다고 한다. - P125
"맙소사. 어떻게 돈이 안 중요해요!" "진짜 안 중요해. 그러니까 너한테 오늘 독서토론 잘했다고 간식도막사줄 수 있다고. 자, 뭐 먹을래?" 돈가스 샌드위치는 역시 맛있었다. 민규가 돈가스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아저씨는 손님을 받고, 토론을 하느라 밀린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음료를 새로 채우고 진열대에 과자와 컵라면도 채웠다. 그러고 나서 안 팔린닭튀김은 먹어서 처리해야 한다며 전자레인지에 데우기 시작했는데, 벌써부터 군침이 났다. 아저씨가 닭튀김도 먹고 가라고 했지만, 눈치가 있는 민규는 냉큼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조용했다. 열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고 아빠는 잠든 듯했다. 민규는 내일도 비가 안 오길 바랐다. 그래야 아빠가 새벽에 일을 나가고 엄마랑 싸울 일 없이 조용할 테니. - P145
인수인계 첫날부터 근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카운터 안은 마치 비행기 조종실처럼 복잡해 보였다. 정면의 포스기 화면은계기반 같았고, 우측에는 점포 운영 내역이 잔뜩 뜬 모니터가 있었고 그 아래엔 점포 경영 시스템 태블릿과 검수기, CCTV 본체, 인터넷 모뎀, 와이파이 기기, 오디오 기기, 프린터가 촘촘히 자리하고있었다. 왼쪽으로는 커피머신과 튀김기가 언제든지 커피를 뽑고 닭을 튀길 기세였고, 카운터 아래엔 수많은 잡동사니들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그리고 카운터 주위를 모자이크 처리하듯 수많은 공지사항이 다닥다닥 붙어 포위하고 있었다. - P171
유통기한 체크 튀김 상미시간 등록 커피 찌꺼기 비우기 이번 주 점격 통합지표 확인 돌발상황 대처 매뉴얼 숙지 FF 배송매니저 연락처 CK 택배기사 연락처 용모/복장 점검 접객 10계명 연습 주류/담배 판매 시 신분증 꼭 확인 마스크 착용 밤 열시 이후 매장 내외 취식 금지 - P171
결제 전 통신사 할인/적립 확인 온장고/냉장고 보충 점검 상품진열/보충시 페이스 업 카드 분실 주의 봉지 유상판매 아니 편해야 할 편의점이 왜 이리 복잡하고 불편한 거지? 점원입장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생각보다 생소한 단어도 많고 조작법을 습득해야 하는 기계도 많았다. 시재 점검과 입고된 물류 검수는틀리기 일쑤였고포스기 사용법은 유튜브를 틀어놓고 수차례 연습해야 했다. - P172
"만화점이라…… 재밌는데요. 만화책도 있을 것 같고. 하하." 곽 선생은 이미 근배를 파악했는지 반응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백화점이 영어로 디파트먼트 스토입니다. 백화점은 물건이 많지만 파트가 나뉘어 있어 해당 점원이 자기 파트만 담당하면 되죠. 하지만 편의점은 혼자서 수많은 물건을 팔아야 합니다. 그러니 일이 쉽지 않겠죠? 나도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세상에는 사소한 일 같아도 필요하지 않은 일이 없구나 느끼며 많이 배웠습니다." 근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 어르신 내가 말 많이 하니까 지지 않으려고 자기도 말씀을 많이 하시네.‘ 그럼에도 새겨들을만한 말이었다. 근배는 편의점 일을 만만히 여겼던 자신의 태도를 반성했다. - P173
엄마를 보낸 후 갖은 일을 전전하며 살게 되자 사는 건 그저 사는것일 뿐 특별한 의미 따위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걱정은 독이고비교는 암이었으며, 과거는 끝났고 미래는 없고 오직 현재만 있을뿐이었다. 지금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었으며 남은 인생은 언제든반납할 용의가 있었다. 그즈음 코로나가 터졌다. 갑갑한 걸 못 참는 엄마가 이 답답한 재앙 전에 하늘나라로 간 게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엄마, 살아 계셨으면 매일 마스크를 쓰고 손 소독제를 로션처럼 바르고 어딜 가나 검문 받듯 방문 기록을 남겨야 하는 꼴을 겪어야 했어요. 하늘나라는안 그렇죠? 꽤 지낼 만하시죠? - P194
2021 년 새해가 밝았다. 왠지 태양도 마스크를 쓰고 일출할 것 같았다. 소의 해이고 백신이 소에서 기원한 단어라며 방송에서는 희망찬 전망을 떠들고 있었으나 근배는 별다른 희망을 품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되던 즈음 알바를 시작해 수많은 일을 전전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마스크가 숨통을 막은 것처럼 힘들어했다. 일자리는 희박하거나 불안했고, 더럽거나 위험했다. 부유한 누군가는 마스크도 좋은 걸 쓰고 거리두기로 인해 자기만의 시공간에서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겠지만, 근배와 같은 도시 빈민에게 코로나 시대는 전시체제와 다름없었다. 생존에대해 고민해야 했고 감염되고 나면 부상병처럼 후송되어 재기가불가능한 꼴이 되었다. - P203
물음표갈고리들이 엉킨 낚싯바늘이 되어 민식의 뇌를 팽팽하게당기고 있었다. 덕분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풀어줄 그 누구도없었다. 누나도 매형도 이마를 손으로 받친 채 물만 들이켜는 그를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은 민식에게 고민해봐야 투항하는 수밖에없다고 침묵의 시위를 하는 것 같았다. 어찌어찌 일어나 식당을 나왔다. 누나가 생각해본 뒤 연락하라고 했다. 매형이 보양식이라도 사 먹고 기운 내라며 봉투를 건넸다. 둘이 주차장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민식은다가온 택시를 향해 겨우 손을 들어 보였다. 집에 와 봉투를 열어보니 2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보양식만 사먹기엔 큰 액수다. 돈은 늘 무언가를 말한다. 의도가 없는 지출은없다. 남의 돈 빼먹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사업을 한 민식은 잘 알고있었다. 200만 원 먹고 자기들 편에 서라는 건데, 그건 민식의 몸값을 후려치고 뺨도 후려치는 꼴이었다. - P224
여름이 끝났다. 난류와 한류가 섞이듯 가을밤의 따스하면서 선선한 기운이 밤의 출근길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었다. 자기 가게에알바하러 가는 기분은 늘 묘했다. 오너 알바라는 금보 형이 만든 요상한 직책이 민식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딸랑. 밤 열시다. 근무 조끼를 입고, 시재 점검을 하고, 저녁 알바 학생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뒤 검수를 끝낸 센터 물류들을 정리한다. 열한 시가 되면 신선식품이 들어오고, 자신이 요청해 들인 신상품을확인하면 일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느껴져 뿌듯하다. 그리고 그 상품이 잘 팔리면 성취감이 들고 일의 재미를 만끽한다. 새벽이 되고 편의점에 고요가 찾아오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 - P245
진열대에 물건을 정돈하듯 그는엉망이 된 기억 속 오와 열을 맞췄다. 그러던 중 엄마가 빌라를 떠나 양산 이모네로 간 게 코로나 때문이 아니란 걸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엄마는 기저질환이 있었다. 엄마는 코로나를 두려워했다. 엄마는 그래서 이모네로 떠났다. 그건 엄마의 핑계였고민식의 자기합리화였다. 엄마는 민식과 함께 지내는 게 힘들어 떠난 것이었다. 그는 이제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두 해 전 겨울에 다짜고짜 엄마의빌라로 왔고, 맥주 사업을 한다고 설치고 다니고, 편의점을 팔자고 엄마를 들볶은 것을. 엄마 집에서 삼시 세끼 꼬박 받아먹으며 사업자금 지원 안 한다고 투덜댄 것을 기억해냈다. - P246
고통스러웠다. 죄스러웠다. 어떻게든 되돌려야 했다. 근무를 마친 어느 날 아침, 민식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에게 ‘오너 알바‘로 한 달째 야간근무 중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이미 소문 다 났다며, 네가 잘하고 있어 기쁘다고 했다. 민식은 백신2차까지 맞으셨냐고 물었다. 엄마는 2차는 좀 아팠는데 그래도 이제 괜찮다며, 그런 것도 물어보고 기특하다고 또 칭찬을 했다. 민식은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말했다. "엄마. 이제 돌아와." 엄마는 말이 없었다. "내가 데리러 갈게. 내일이라도 당장. 내가 이제 낮에 자고 밤에 - P246
일하러 가니, 엄마랑 집에서 마주칠 일 별로 없어. 엄마, 나 이제 편의점 도시락도 잘 먹어. 밥 차려줄 것도 없고 가게 팔겠다고 설치지도 않을게. 그러니까 이제 돌아와 내가 데리러 갈게. 응?" 여전히 전화기 너머에는 침묵이 그득했다. 민식은 울먹임이 저너머로 들리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그때 엄마의 차분한 목소리가들려왔다. "데리러 갈게 아니고, 모시러 갈게라고 해야지." "으응. 모시러 갈게. 엄마 모시러 갈게요!" 이번에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다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렴." - P247
아들과의 전화를 끊고 나서 잠깐 휘청했다. 다행히 벽을 짚은 뒤천천히 걸음을 옮겨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에 놓인 갈색 캠핑 의자에 앉으니 녹음으로 가득한 정원이 한눈에 담겨왔다. 지난해 여름에도 여기서 이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던 기억이 났다. 아들의전화를 기다리며. 하지만 아들은 정원 끝 감나무가 가을의 결실을뽐낼 때도, 낙엽이 쌓인 정원에 하얀 눈이 내려앉을 때도 연락이 없었다. 안 풀리는 삶에 지쳐 자포자기한 걸까? 코로나 후유증으로여전히 몸이 불편한 걸까? 마음 나눌 사람이 곁에 없어 답답한 걸까? 아니면 잔소리 많은 엄마가 옆에 없어서 편한 걸까? 수많은 질문과 그 질문에 담을 마음의 소리가 있었지만 나는 침묵했다. 그것이 아들을 위해서인지 나 자신을 위해서인지 모르겠 - P248
다. 다만 우리 둘 모두 고난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1년 하고도 4분의 1의 시간 동안 나는 이곳에서 혼자 아닌 혼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비대면의 시절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즉에필요한 날들이었으나 챙기지 못해 결핍된, 어떤 성분이 담긴 시간에 온몸을 담가야 했다. 네 해 전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나는 하루하루를 평소와 같이 살기 위해 온 힘을 써야 했다. 평범한 삶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랄까,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안간힘이랄까? 편의점을 차린 것도 어떻게보면 분주히 보내야 하는 날들이 필요해서였다. 24시간 내내 불켜진 그곳이 방범 초소인 양 내 삶을 호위하길 원했다. ALWAYS편의점이 남편의 빈자리를 그 이름처럼 ‘언제나‘ 채워주길 희망했다. - P249
팬데믹이 세상을 멈추게 하고 나서야 나는 맹목적으로 지속했던그 시간들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그즈음 편의점의 밤을 지키며 자신을 찾은 한 남자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나는 독고라는 사내의 용기에 감화되었다. 그는 내게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해했지만 나 역시 그를 통해 정체된 삶에서 벗어날 기운을 얻었다. 어쨌거나 삶은계속되고 있었고, 살아야 한다면 진짜 삶을 살아야 했다. 무의식적으로 내쉬는 호흡이 아니라 힘 있게 내뿜는 숨소리를 들으며 살고싶었다. 패잔병의 몰골로 아들이 내 스무 평 공간을 찾아온 건 두 해 전이었다. 그럴 때 필요한 게 엄마이기에 따뜻하게 아들을 받아주었다. - P249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새삼스러웠다.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은둔 생활 삶의 큰 쉼표. 이곳이 있기에 가능했고, 이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언니와 개와 함께 산책을 다니던 오솔길 조카와 함께 올랐던 살구나무 많던 뒷동산, 여름에 수박을 담가놓았다 꺼내 먹던 건넛마을 계곡. 모두 잊지 못할 것 같다. 자연과 자연을 닮은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마음과몸에 치유를 가져오는지를, 도시에서만 살던 나는 간과했다. 철이면 철마다 산과 바다로 등산과 낚시를 다니던 남편의 행동이 얄미워서였을까, 좀처럼 나는 도시를 벗어나기 싫어했다. 하지만 이제는 자연에 스며들 수 있게 되었고, 슬며시 기댈 수 있게 되었다. - P261
그날 밤 나는 묘한 만족감에 젖어 잠을 청했다. 행복했냐고? 모르겠다. 행복은 바라지도 않는다. 삶의 순간순간에 만족하는 찰나가 잦길 바랄 뿐이다. 같이 있는 동안 언니는 내가 예전보다 느슨해져서 좋다고 했다. 사실 언니와도 같이 지낸 게 수십 년 만이라 걱정이었는데, 그동안 둘 모두 늙고 닳아 여유가 생겼는지 서로를 용인할 수 있었다. 너처럼 의지가 강한 사람은 늙어서도 고집쟁이가된다는데, 생각보다 유들유들해져 다행이라고 한 말은 좀 거슬렸지만 고집은 자기도 못잖았으면서! 나는 상경해 받을 과제에 대해 생각했다. 언니와 조카의 삶에서배운 대로 아들과 효율적인 공생관계를 맺을 것.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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