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고양이와 인간을 사랑한 고릴라
코코Koko는 인간의 언어로 인간과 소통한 암컷 서부 롤런드고릴라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영어 단어 2천여 개를 알아듣고 수어 천여 개를 구사했다. 그의 수란, 연구자들이 미국표준수어를 변형해 만든 ‘고릴라수어Gorilla Sign Language‘여서 극소수만이해하는 일종의 암호였지만, 그와 인간이 ‘대화‘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코코는, 언어능력을 떠나 인간이 다른 영장류에게품을 만한 환상을 채워줄 만큼 위엄 있고 점잖았으며, 여린 생명, 특히 어린 고양이들에게 자애로웠다. 코코는 단일 개체로선 가장 오래 인간의 실험-관찰 연구 대상이었던 비호모사피엔스였다. 코코는 한 살이 채 안 된 1972년부터 45년여 동안 발달심리학자 프랜신 "페니" 패터슨Francine "Penny" Patterson과 그가 설립한 고릴라재단 The Gorilla Foundation 연구자·사육사들과 함께 살았다. 코코는 넘치도록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지만, 동물원 고릴라에게 대체로 허용되는 무리 생활을 누리지는 못했다. - P171
페니의 연구는 르완다의 야생 고릴라 무리에 섞여 그들을 연구한 다이앤 포시Dian Fossey의 그것과 방법론이나 연구 목적 등에서 상반되는 거였다. 1977년 포시도 코코를 만난 적이 있지만, 그의 논평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표시는 자신이 익힌 야생 고릴라들의 발성 언어를 코코에게 시연했고, 코코가 무척 호기심을보였다는 짤막한 글만 재단 연표에 실려 있다. 일부 스타 아역배우들이 타의로 은퇴한 뒤 겪는 어려움처럼, 실험이 끝나고 동물원으로 복귀한 동물들도 새 삶에 쉽사리 적,. - P178
응하지 못한다. 인간의 살뜰한 보살핌을 더 이상 못 받고 무리에서 경쟁해야 하는 일상은 우울증이나 과도한 공격성의 원인이 되고, 더러는 조기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그들에 비하면 코코는행운아였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2011년 매거진 <더 위크The Week> 기자는 자신의 갓난아이 적사진을 본 코코가 두 팔로 아이를 안고 어르는 흉내를 내더니 사진을 가져가서는 물끄러미 쳐다본 뒤 입을 맞추고 제 인형을 건네더라는 일화를 전했다. 언어 능력을 덮어두더라도, 코코는 저런 뭉클한 이야기로 동시대 인간에게 큰 감동과 사랑을 전한 비범한 고릴라였다. 그리고 그런 비범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보이는 그의 모습 뒤에 가려진 것들을 애써 살피게 했고, 인간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게 했다. - P179
첫 고양이 올볼의 사고사(1984) 소식을 전해 들은 코코가 "고양이, 울다, 안됐다, 코코-사랑 Cat, cry, have-sorry, Koko-love"라 말하면서슬퍼했다는 일화를 환기하면서 ‘비인간 영장류의 슬픔과 언어적표현에 감동했던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의 저자 바버라 J. 킹Barbara J. King은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보낸 이메일에서 "코코는 인간의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개별 동물들이 치르는 회생에 대해서도 새삼 깨닫게 했다. 코코의 삶에 박수를 보내더라도, 우리는 그가 고도로 통제된 비자연적 환경에 갇혀 평생을 보내야 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 P179
엘리 아비비 시오니즘에 맞선 유대인 히피
세속주의 시오니즘Zionism의 핵심은 이스라엘 국가 건설이다. 그건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꿈꿨던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과 닮았다. 현대 시오니즘 운동의 이론가이자 선동가로, 오늘날 이스라엘 시민들이 국부쯤으로 추앙하는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1896년 책 『유대 국가』에서 국가의 완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는 단순히 우리의 복장, 관습, 전통, 그리고 언어를 되찾는 외적 동질성뿐 아니라, 느낌이나 태도까지도 동일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 물샐틈없는 일체주의는 구약 이사야서의 "흩어짐은 하나의 심판이요, 흩어진 유대인들이 다시 ‘뭉침‘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문장에 기반한다. - P181
19세기 말 본격화한 시오니즘 운동은 2차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거치며 더 맹렬해졌고, 이런저런 곡절을 거쳐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실현됐다. 하지만 헤르츨의 이상은 국가 건설만으로완성될 수 없는 종교 이데올로기이기도 했다. 민족의 단결을 방해하는 온갖 사상들(이를테면 자유주의)이나 물리적 제약들(예컨 - P181
대 협소한 영토)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뒤따라야 한다. 따라서 시오니스트에게 보편 인권과 자유, 정의, 휴머니즘 같은 근대적 가치는 바빌론의 시대에서부터 이어져온 신의 지침 안에서만 대접받는다. 이스라엘 독립선언문이 "모든 이웃 국가들과 그 국민들에게" 제안한 "평화와 우호 협력과 유대"도 근본적으로는 자기편에게만 유의미하다.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이라고도 불리는1948년의 1차 중동전쟁부터 근년의 가자 전쟁Gaza War까지, 국제사회가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만 십여 차례를 치렀다. 온전한 침을 위해 전쟁을 하고 전쟁을 위해 더 굳게 뭉치는 시오니즘의 중식 회로 안에서, 이스라엘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민족) 구심력과 장악력을 발휘해왔다. - P182
엘리 아비비Eli Avivi는 그런 이스라엘의 히피였다. 그는 건국 직후인 1950년대 초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시오니스트 국가권력에맞서, 히피들의 미덕이라 할 만한 자유와 평화, 탈권위, 억압 없는 사랑과 게으름을 추구했다. 국가의 압력과 알력에 맞서던 끝에 자신의 여권을 찢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71년 레바논 접경의 텅 빈 마을 아크지브Akhziv 에 초소형국가 ‘아크지브랜드 Akhzivland‘를 수립해 스스로 대통령이 됐다. 자칭 "오만의 술탄에 이은 중동 최장수 권력자"로서, 중동 국가로는 유일하게 단한 번도 무력분쟁에 개입하지 않은 ‘업적‘을 남긴 그가 2018년5월 16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 P182
윌리엄 디멘트 졸음의 몽매에서 인류를 깨운 의학자
미국 연방 고속도로교통안전국(이하 교통안전국) 국장을 지낸 마크 로즈킨드가 1970년대 스탠퍼드대를 다니던 시절, 학부 졸업생 약 80퍼센트가 수강했다는 ‘전설‘의 두 교양 강좌가 있었다. 정신의학자 헤런트 카차두리안Herant Katchadourian의 ‘인간과 성생활‘, 그리고 수면의학자 윌리엄 디멘트william Dement의 ‘잠과 꿈sleep and18‘이다. 청년기 갈증(섹스와 잠)의 반영일 수 있지만, 거기에는 전복적 의미도 있었다. 전자는 당연히 1960~70년대 성 혁명의 연장선 위에 있었고, 후자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자본주의 정신』이래의 절대 미덕, 즉 근면성실과 ‘깨어 있음‘에 대한 반박이었다. 디멘트는 졸리면 무조건 자야 하고, 더 중요한건 졸리지 않도록 미리 충분히 자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 P191
잠은 왜 자고 꿈은 왜 꾸는지, 인류는 아직 온전히 알진 못한다. 하지만 건강한 잠은 어떠해야 하는지는 뇌파와 체온, 혈압, 맥박, 혈중산소농도 같은 다양한 기준들을 통해 웬만큼 밝혀냈다. 그게수면다원검사다. 연령대별 적정 수면 시간도,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대체로 성인 기준 하루 7~9시간 정도로 수렴돼왔다. (디멘트는 "더 잘 수 없을 때까지 자는 게 적정 시간"이란 입장이었다.)수면의학자들은 수면 부족 및 장애가 혈압과 콜레스테롤을 높 - P195
여 뇌와 심혈관에 악영향을 끼치며, 비만과 2형당뇨, 인지기능 저하와 우울증 등의 질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혀왔다. 하지만 디멘트가 미국인 약 20퍼센트가 수면무호흡 증상을 겪고있다는 가설을 제기하던 1980년대 말 학계는 ‘그가 미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정도였다. 디멘트의 판단은 오히려 보수적이었다. 디멘트는 대학 농구팀 선수들을 대상으로 수면량과 자유투 성공률의 상관관계를 연구했고, 2002년엔 만 11일, 264시간 동안잠을 안 자 기네스북에 오른 고교생 랜디 가드너를 관찰하며 새벽 3시까지 테이블 야구 동전 게임을 무려 100회나 치르기도 했다. 만 74세의 그는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그는 십대의 에너지에 도전할 만큼 용감했다. - P196
동료와 제자들은 한목소리로 그를 ‘수면의학의 아버지‘라고 애도하고 있다. 스탠퍼드대 교수 에마뉘엘 미뇨는 "(수면의학의 거의 모든 게 실은 빌로부터 시작됐다"라며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잠에 대해 무지했거나 적어도 10년은 늦게 알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10년은 무수한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브라운대 교수 메리 카스카던은 "아무도 잠에 관심을 두지 않던 그황무지에서 디멘트 혼자 잠의 문제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 했고, "거의 혼자서 연구비를 타내고, 의회를 설득해 이만큼 오게 했다"고 말했다. 디멘트는 1928년 워싱턴주에서 태어나 시카고대에 진학했고, 2차대전 종전 직후 일본 주둔군 정훈병으로 파병돼 신문을 제작했으며, 학부 시절엔 수준급 베이시스트로서 퀸시 존스, 스탠 게츠 등과 잼세션을 하기도 했다. 훗날 그는 "고만고만한 음악가보단고만고만한 의사가 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공부에 몰두했다고말했다. 그는 2003년 정년 퇴임 하고도 2015년까지 ‘잠과 꿈‘ 강의를 계속했다. - P197
왕슈핑 중국 혈장 경제의 위험을 경고한 내부고발자
미국 뉴요커들이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이냐‘고 묻는 건, 질문이 아니라 대개는 ‘촌놈‘이라는 의미의 조롱이다. 굳이 웨스트버지니아인 까닭은, 지리적으로 적당히 가까우면서 정서 면에서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가수 존 덴버가 <Take Me Home, CountryRoads>란 노래에서 웨스트버지니아를 "거의 천국"이라고 너무 표나게 추켜세운 탓일 수도 있겠다. - P201
중국 상하이나 칭다오의 도시인들에겐 ‘허난성이 그런곳이다. 광역 행정단위 가운데 소수민족 자치구를 제외하면 가장 가난하고 낙후한, 황하강 남쪽 내륙농업지역이 허난성이다.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의 여진이 가장 오래 지속됐고, 1970년대 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1980년대 자본주의화 과정에서도동중국해 도시들에 밀려 소외됐다. 대신 인구는 많아서 허난성의 인구수는 31개 성·시·자치구 가운데 경제 선진 지역인 광둥산둥에 이은 3위(2019년 기준 약 9600만 명)다. - P201
허난성이 1990년대 초중반 이른바 ‘혈장 경제Plasma Economy‘의거점이 된 배경이 그러했다. 혈장 경제란 국가와 허난성 보건국이 주민들의 피(혈장)를 헐값에 사들여 혈액제제 제약회사에 비싸게 팔아넘기는 매혈 시스템이다. 1990년대 초 허난성에서117개 현에 400여 개의 채혈 센터가 운영됐다. 센터 입구에는 "팔 뻗어 혈관을 보여주고 주먹 쥐고 계십시오. 50위안(당시 기준 약 7.5~8달러)을 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어지간한 농가가 1년 동안 농사지어 쥘 수 있는 돈이200달러 안팎이던 시절이었다. 중국 문학계 거장 옌롄커의 소설『딩씨 마을의 꿈』에는 한창때의 허난성 마을들이 ‘쇠 냄새(피 냄새)‘로 흥건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게 과장이나 허구가 아니라는 증언도 있다. - P202
그 돈 냄새, 피 냄새가 사실은 죽음의 냄새였다. 비용과 효율성 때문에 주삿바늘을 재활용하는 일은 예사였고, 채취한 혈액을 원심분리기로 돌려 혈장만 남기고 나머지 혈액 성분은 식염수에 섞어 재수혈하는 과정에 타인의 혈액이 섞이는 일도 허다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허난성 주민들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되고,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앓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2001년에야 저 사실을 처음 공식 인정했다. 중국 보건성 관계자는 매혈로 에이즈에 감염된 허난성 주민이 최소 6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인류 최대·최악의 의료 스캔들이었다. 허난성 저우커우시의 감염질환 연구자 왕슈핑은 매혈자들 - P202
이 에이즈에 무방비로 감염되고 있다는 사실을 1995년 처음 밝혀냈다. 시와 허난성 보건국은 그의 보고를 묵살했다. 모처럼 지역 경제에 화색이 돌게 한 혈장 경제 자체를 위협하는 폭로였기때문이다. 왕슈핑은 베이징 국가보건성 산하 국립바이러스연구소에 샘플 재조사를 의뢰했다. 중국 정부는 이듬해 4월 모든 채혈 센터를 잠정 폐쇄했다. 왕슈핑은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지만, 대가는 훈장이 아니라 수난이었다. 허난성 당국은그를 해고했다. 직장 동료였던 남편과는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베이징으로, 미국으로 떠돌아야 했다. 그가2019년 9월 21일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 인근 계곡에서 트레킹 도중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59세. - P203
허난성 성도 정저우의 산부인과 의사 가오 야오제 는중국 HIV 예방 캠페인과 에이즈 환자 권익 운동의 상징적 존재다. 그는 1996년 허난성의 첫 공식 에이즈 사망자로 기록된 여성환자를 돌본 이래, 사비를 털어 HIV 예방 팸플릿을 제작해 지역병원과 시민들에게 배포하고, 해열제와 진통제로나마 환자들을보살폈다. 그가 왕슈핑과 알게 된 것도 1996년이었다. 왕슈핑은HIV 감염경로와 실태, 에이즈발병과 진전 추이 등 연구 자료를지속적으로 가오에게 전달해 당국의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하게했다. 1996~2001년 베이징 미국대사관에서 일한 전 외교관 데이비드 코히그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왕슈핑은 당시 중국의HIV 및 에이즈 감염 실태에 관해 신뢰할 만한 거의 유일한 정보원이었다"고 말했다. 왕슈핑은 가오의 ‘은밀한 배후‘이자, 중국 에이즈 원년의 내부고발자였다. - P208
왕슈핑은 2001년 가을 위스콘신의대 연구원으로 채용돼 미국으로 이주했고, 유타주의 한 아쿠아리움 재무책임자와 재혼한뒤 솔트레이크시의 유타주립대 암연구센터에서 일했다. 그는 직접 정한 영어 이름 ‘선샤인‘처럼 무척 활달하고 유쾌해서, 기자와 인터뷰하는 자리에 무지개색 발가락 양말을 신고 나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남편과 훗날 미국으로 건너온 딸 외에 조카 둘을 입양했고, 샴고양이 빌리Billy와 베이글 Bagel이란 이름의 개와 - P208
함께 지냈다. 그가 빌리의 영특함을 자랑하는 유튜브 영상이 볼만하다. 2019년 9월 초 영국 런던 햄스테드 극장이 <지옥궁의 왕 TheKing of Hell‘s Palace>이란 제목의 연극을 처음 무대에 올렸다.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 출신의 연출가 마이클 보이드가 연출을 맡은 작품으로, 왕슈핑과 1990년대 중국 혈장 경제 이야기였다. 왕슈핑은 초연 직전 인터뷰에서 중국 공안 요원이 저우커우시의 옛 동료와 친척들을 협박해 공연 취소를 종용했다면서 "내가 직접 그들에게 맞서는 것보다 친구나 친척을 인질 삼아 내 입을 막으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일이 더 힘들었다"며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거짓말 같은죽음에 일부 외신은 ‘명백한‘ 심장마비라고 굳이 적었다. - P209
조지나 메이스 멸종위기종을 정의한 과학자
세계자연기금과 런던동물학회의 생물종 다양성 지표‘리빙 플래닛 인덱스Living Planet Index‘ 2020년 보고서는 지구 야생 척추동물 개체수가 1970~2016년 사이 68퍼센트 감소했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인구는 37억 명에서 74억 명으로 두 배 늘었다. 유엔 생물다양성과학기구IPBES는 2019년 5월 보고서에서 생물 약 100만종이 인간으로 인해 멸종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만 년 전지구의 육상 척추동물 사이 비중이 1퍼센트에 불과하던 호모사피엔스는 2011년 32퍼센트로 늘어났고, 야생동물은 99퍼센트에서 1퍼센트로 격감했다. 나머지 67퍼센트는 인간을 위한 가축이었다. 지구의 ‘여섯 번째 대멸종sixth Mass Extinction‘ 진단을 뒷받침하는 데이터는 저것 말고도 부지기수다. 2차대전의 수많은 살육과 민족 멸절의 야수적 기획을 경험한국제사회는 유엔 창설 3년 뒤인 1948년, 유엔 회원국과 비정부기구가 연합한 세계 최대 환경단체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International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을 설립했고, 1964년부터 IUCN ‘레드리 - P211
스트Red List‘, 즉 멸종위기종 보고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IUCN은숫자 말고도 사라져가는 종의 명단을 함께 발표한다. 근년의 보고서에는 유럽햄스터, 북대서양참고래, 황금대나무여우원숭이 등3만 2천여 종이 담겼다. IPBES가 밝힌 멸종위기종 100만 종과 IUCN의 3만 2천 종의수치 차이는, 인류가 우주의 생태계만큼 지구 생태계를 모른다는사실에 기인한다. 1980년 일군의 곤충학자가 중미 파나마 우림의나무 열아홉 그루를 털어 곤충을 채집했다가 딱정벌레의 약80퍼센트(1200여 종)가 미기록종인 사실에 경악했다는 유명한일화가 있다. 2020년 현재 인류가 아는 지구 생명체는 140만~180만 종이지만, 실제 종 수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 P212
최소 1억 종은 되리란 추정도 있다. 그 경우 한 해 멸종률을 1퍼센트로만 잡아도 매년 100만 종이 인간도 모르게 인간에 의해 사라지는 셈이 된다. 과학자들은 인간으로 인한 생물종 멸종률이 저절로 멸종하는 자연 멸종률의 천에서 만 배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IUCN 레드리스트는 예산과 종에 대한 지식의 한계 때문에 이미 확인된 생물종 가운데 일부만을 대상으로 단위 지역 내 개체수 변화와 서식지 파괴를 실증적으로 분석해 발표하는, 가장 ‘보수적‘인 보고서다. 멸종위기종 3만 2천 종이라는 숫자는 2019년기준 기록종의 10퍼센트도 안 되는 12만 종을 조사한 결과였고, 2020년 목표는 16만 종을 조사하는 것이었다.그 때문에 환경학계와 활동가 사이에는 IUCN 보고서가 위기 실태를 온전히 반영하지못하니 조사 및 평가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UCN 레드리스트가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 - P212
는 지구 생태계 지표라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다. 생물종 다양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추정, 실질적 보존 활동은 레드리스트 덕에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1990년대 삼십대였던 무명의 여성 생물학자 조지나 메이스Georgina Mace의 공이었다. 메이스는 주먹구구식이던 IUCN 레드리스트에 과학적 선정 기준과 조사 방법론을 도입했고, IUCN을 좌지우지하던 학계 원로와 국제적권위자들을 논박하고 설득해 지금의 방식을 채택하게 했다. 담대한 추진력과 끈질긴 설득력으로 IUCN 레드리스트의 권위를 구축하고, 1990년대 이후 유엔 및 국가별 생태보전정책과학계 · 비정부기구 사이의 이견들을 조율해온 그가 2020년 9월 19일 암과의긴 투쟁 끝에 별세했다. 향년 67세. - P213
‘소프박스 사이언스Soapbox Science‘는 영국의 젊은 여성 과학자들이 여성 과학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2011년 만든 단체다. 그들이 런던 거리에 직접 나가 각자의 연구 분야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행사를 기획하며 맨 먼저 조지나 메이스를 떠올린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세계적 팝 스타에게 무료 거리공연을 청하는일만큼이나 대담한 일이기도 했다. 단체의 창립행사 때도 축하연설을 해줬던 메이스는 흔쾌히 동참을 약속했고 동료 여성학자들의 참여도 주선했다. 그는 ‘자연의 가치는 무엇일까요what is thevalue of nature?‘라는 문구와 함께 자기 이름을 적은 피켓을 들고 행사 당일 런던 사우스뱅크 거리에서 천여 명의 시민을 만났다. 런던동물학회 회원이기도 한 소프박스 사이언스의 코디네이터 이슬라 와튼은 "메이스가 친구들에게 ‘소프박스 사이언스 거리 행사는 내 생애 최고로 짜릿한 경험이었다‘고 고백한 사실을 나는한참 뒤에야 전해 들었다"라고 부고에 썼다. 조지나 메이스는 경영 컨설턴트 로드 에번스와 1985년 결혼해 자녀 셋을 두었다. 인류의 생물종 다양성 보존 노력은 성과보다 실패의 기록이 훨씬 두텁다. 세계자연기금 설립자 피터 스콧Peter Scott 1970년에 이미 "우리는 실패했고, 단 한 종도 구해내지 못했다. 우리가 쓴 돈으 - P218
로 콘돔을 사서 배포했다면, 더 나았을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지나 메이스는 2009년 인터뷰에서 "모든 데이터가 말해주듯, 인류가 한마음으로 문제를 풀어간다면 지금도늦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사망하기 아흐레 전인 2020년 9월 10일<네이처>에 발표한 그의 논문 요지도 인류에겐 아직 종 다양성 "그래프를 반전시킬 수 있는bend the curve" 기회가 남아 있다는 거였다. 영국의 저명한 환경운동가 겸 탐사 저널리스트 조지 몽비오는 근작 『활생』에서 무엇에 맞서 싸우는지 아는 것만큼이나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알아야 한다며 "1온스의 희망은 1톤의 절망보다 강력하다"고 썼다. 한껏 치마를 추켜올리면서도, 다시 말해원하는 바를 한껏 추구하면서도, 끝내 현실주의자였던 메이스는1톤의 희망을 남겼다. 그는 동료들을, 인류를 믿었다. - P219
살로메 카르와 재감염의 두려움을 이겨낸 에볼라 전사
에볼라 출혈열은 이제 치사율이 30퍼센트대로 떨어졌지만, 한때 90퍼센트에 이르던 악성 바이러스 전염병이다. 2014년 ‘서아프리카 사태‘ 때의 치사율은 40퍼센트대였다. 2013년 말 기니를 진앙지로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을 강타한 에볼라 출혈열은WHO 집계에 따르면 2015년 6월까지 1만 118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 P221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의사와 연구자들은 에볼라의 실체를 온전히 알지 못했다. 면역에 관한 한, 에볼라 출혈열이 처음 발병한1970년대 이래 중복 감염된 예가 단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다는게 그들이 아는 전부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에볼라 치유자의 면역력을 100퍼센트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없는의사회MSF, Medecins Sans Frontieres 등 국제 의료구호단체 의료진들이 에볼라에 걸렸다가 회복한 치유자들에게 도움을 청한 건 그만큼 일손이 절박하게 필요해서였다. 에볼라 희생자들 중 600여명이 의료진이었고, 발병 초기 라이베리아 내 의사는 50명에 불 - P221
과했다. 오랜 내전의 후유증도 극복하기 전이었다. 전염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회복한 뒤, 의료진의요청에 응해 다시 그 사투의 현장에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재감염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환자들과 살을 맞대며 간병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라이베리아의 28세 여성 살로메 카르와Salome Karwah는 맨처음 그 일을 시작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처럼 바이러스에 면역된 이들을 ‘슈퍼 파워스super Powers‘라 부르곤 했다. 살로메 카르와가 제 몸의 면역력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의사들이 어떤 말로 그를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다시 사는삶을 덤이라 여겼고, 재감염의 공포에 맞설 만큼 강했다. "MSF 치료센터에 간 첫날, 시신들이 들려 나가는 걸 보고는 친구에게 ‘나, 못하겠어‘라고 울면서 말했어요. 하지만 바로 다음 날 ‘그냥 우는건 내 슬픔을 견디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차라리 그들을 도우며 최대한 나를 바쁘게 하기로 결심했어요."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 외곽의 MSF 치료센터는 불과 며칠 전그의 부모와 삼촌, 숙모와 조카가 잇달아 숨진 현장이자 카르와와언니 조세핀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곳이었다. - P222
엄마 얼굴도 못 본 막내를 포함해 여섯 살 미만 아이 넷을 도맡은 해리스는 "살로메는 아내이기 이전에 내 친구였다. 그를 대신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언니 조세핀은 "동생은 최근까지도 생존자 모유 감염 검사 등 정부 일을 도왔다" 며 "동생은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제부터 나는 더 이상 치유자가 아니다. (...) 만일 내가 아파 병원에 가더라도 나는 자신을 감출 것"이라고 말했다. 스무 쪽에 달하는 2014년 <타임> 커버스토리는 "분무기를 들고 산불과 맞섰던"초기 에볼라 전사들의 고투와 함께 ‘안개 전쟁Fog of War‘이라 불렸던 그 전쟁이 끝난 뒤 안개가 걷힌 자리에남은 진실들에 대해 썼다. "이 싸움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 다음 전쟁이 시작될 때 우리는 더 잘 대비하고 있어야 하고 덜두려워하며 더 잘 싸워야 한다는 사실, 그러기 위해서라도 - P228
2014년의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카르와의 죽음은 거기에, 아무리 불편해도 잊지 말아야 할 또하나의 진실을 보탰다. 우리의 전장에는 에볼라 바이러스 같은 명확한 적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진실, 다른 듯 다르지 않은 더 지독한 적들이 있고 전장 안에 또 다른 전장이 있다는 진실, "할 말이 없다"는 MSF 활동가의 비탄과 "이제 나를 감출 것"이라는 조세핀의 분노 어린 절규를 결코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진실. - P229
질 서워드 강간의 피해자 스스로의 구원자
1986년 3월 6일 일요일 오후, 영국 런던 일링Ealing 자치구 목사영국국교회 목사 마이클 서워드Michael Saward와 스물한 살 딸질 서워드 Jill Saward, 질의 남자 친구 데이비드 커David Kerr는 함께TV를 보며 담소 중이었다. 초인종이 울렸고, 마이클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문을 열었다. 들이닥친 건 술과 마약에 취한 4인조 복면강도였다. 주범 로버트 호스크로프트(당시 34세)와 앤드루 번은 마이클과 데이비드를 묶고 금고 있는 곳을 대라며 크리켓 배트로 무차별 구타했다. 나머지 둘(마틴 매콜, 크리스토퍼 번, 당시22세)은 질을 칼로 위협하며 2층 침실로 끌고 가 강간했다. 질은임신도 못 하게 만들어버리겠다는 둥 강간범들이 내뱉는 비열한말들 사이사이 아버지와 연인의 처절한 비명까지 견디며 속으로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나중에 저들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가기억할 수 있는 모든 사소한 것들까지 기억해야 해.‘ 주말 한낮 목사관에서 벌어진 그 야만적인 사건은 ‘일링 목사관 강간 사건‘으로 불리며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언론사 - P231
들의 취재 열기가 뜨거웠고, 일부 타블로이드 신문은 이성을 잃었다. <더 선>은 사건 직후 교회를 다녀오던 질의 전신 사진을 찍어 눈만 가린 채 1면에 게재하는 ‘특종‘ 경쟁에 취했다. 11개월 뒤 올드베일리 형사법원에서 범인 세 명에 대한 재판이열렸다(크리스토퍼 번의 형 앤드루는 수감 중 죄수들에게 폭행당해숨졌다). 검찰은 질이 성경험이 없었다는 점, 다시 말해 ‘완벽하게 순결한 희생자‘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며 죄의 무게를늘리려 했다. 법정에서 질은 적어도 겉으로는 의연했다. 훗날 아버지 마이클은 "(질은) 장기간 심리치료를 받았고,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상황이었지만 흔들리고 상처받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 딸은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말했다. - P232
판사 존 레너드 John Leonard는 그 모습을 오해했다. 그는 강간에가담하지 않은 주범 호스크로프트에게는 강도죄로 14년 형을, 강간을 범한 둘에게는 강도죄와 강간죄를 적용해 각각 10년 형과8년 형을 선고하며 "피해자의 정신적 외상이 그리 심하지 않아형량을 경감한다"고 판결문에 밝혔다. 여성단체는 물론이고 정치권까지 나서 성범죄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성토했다. 대처 총리도 "매우 유감"이라고 밝혔다. 가장 크게 절망한 건물론 질을 포함한 피해자들이었다. 그는 너절한 법과 제도, 법원·검찰·언론을비롯한 사회 전반의 나태한 성범죄 인식에 한 번 더 상처 입고 분노했다. - P232
일링 목사관 사건은 성범죄에 대한 영국 사회의 총체적 몰이해를 폭로한 계기가 됐다. 의회는 1987년 법을 개정해 강간 피해자의 익명성을 보장했고, 언론은 보도지침을 마련했다. 사건 전까지 영국 형사재판에서는 검사가 "무죄 판결에 대해 법률 위반이나 절차 문제로만 항소할 수 있었고, 사실의 오인 또는 양형이 부당하다는 이유로는 원칙적으로 항소할 수 없었다." 그 규정이 바항소할뀌어, 현저하게 양형이 관대하다고 판단할 경우‘ 검찰이수 있게 된 것도 그 사건 이후부터였다. - P233
사건 4년 뒤인 1990년, 질은 강간 나의 이야기 Rape: My Story』(웬디 그린 공저)라는 제목의 책을 자신의 이름으로 냈다. 그의 책출간은 그 자체로 강간 피해자가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스스로공개한 영국 최초의 사건이 됐다. 책은 사건 정황과 재판, 그 이후 겪은 고통과 사회제도의 또 다른 폭력에 대한 고발이었다. 한편 사회의 야만과 관음증적 관심에 대한 질의 당당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강간은 당신의 삶을 바꾼다. 당신은 결코 과거의당신과 똑같아질 수 없다." 책 출간 이후 질은 신문·방송 인터뷰와 각종 강연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또 여러 단체를 설립해 성폭력 피해여성 구제와 성범죄 관련 법 개정 운동, 성폭력에 대한 인식 개선에 생을 바쳤다. 그가 2017년 1월 5일 뇌출혈로 별세했다. 향년 51세.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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