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 리히너
캄보디아 어린이를 보듬은 첼리스트 의사


캄보디아 시엠레아프 Siem Reap의 앙코르와트를 여행한 이라면, 남문에서 도보로 5분 남짓 거리의 아동 전문병원 자야바르만7세Jayavarman VI‘ 앞에 걸린 ‘비토첼로Beatocello‘의 자선 콘서트 홍보 입간판을 봤을 수도 있다. 혹시 짬이 나서 거기 들렀다면, 어린이 환자와 보호자들, 관광객들에 둘러싸인 비토첼로의 바흐나 카잘스, 혹은 자작곡 연주와, 그 연주를 배경음악 삼아 판소리 사설처럼조리는 캄보디아의 의료 현실, 그리고 자기 병원 이야기를 듣기도 했을 것이다. 토요일 저녁, 관광 성수기엔 목요일까지 매주 두차례 열리던 자선 콘서트의 마지막 멘트는 으레 후원 요청이었다.
"나이 든 방문객은 돈을, 청년들은 헌혈을 해달라. 청년도 노인도아니면 둘 다 기부해달라." 그의 말에 대개는 웃었지만, 그는 늘 간절했다. 웬만한 여행자 하루 숙박비면 결핵이나 폐렴으로 입원한어린이 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99

그는 캄보디아 내전이 끝난 직후인 1992년 수도프놈펜에 무료 아동병원 ‘칸타보파 제1병원Kantha Bophal‘을 연이래 시엠레아프의 자야바르만까지 총 5개 아동 · 산모 병원을 개설해 운영하며 지금까지 25년여간 약 1천 7백만 명을 진료하고 중환자 170만 명을 치료했다. 병원을 늘리고, 의료 기구를 장만하고, 의사 등 직원 2500여 명의 급여를 마련하는 모든 책임이 그의 것이었다. 그는 병원 운영을 동료에게 맡긴 채 고국 스위스의여러 도시를 첼로를 메고 다니며 모금 연주회를 열곤 했고, 스위스와 캄보디아 정부 당국자들의 지원을 부탁하러 다녔으며, 그의
"지속 불가능한" 의료봉사 모델을 비판한 세계보건기구WHO 등국제기구와 글로벌 비정부기구NGO 등에 맞서 싸웠다. 스스로 지은 예명 비토첼로로 더 알려진 비트 리히너가 2018년 9월 9일 별세했다. 향년 71세. - P100

캄보디아 현대사는 1991년 파리평화협정 전과 후로 나뉜다.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다 1954년 독립했지만 이내 인도차이나-베트남전쟁에 휩쓸렸고, 크메르루주Khmer Rouge 집권기(1975~1979)의 폭압 이후에도 약 10년간 베트남 등이 개입한 내전을 치러야 했다. 그 끝이 파리평화협정이었고, 1년의 과도기를거쳐 망명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와 훈센Hun Sen총리 체제의 입헌군주정이 시작됐다. 농업사회주의를 표방했던크메르루주 정권은 부르주아와 인텔리겐치아를 표적 삼아 탄압했고, 그 결과 지식인과 의사 등 전문인 다수가 학살당하거나 수 - P100

용소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숨졌다. 독립 이후 어렵사리 구축해온사회·의료 시스템이 사실상 와해된 것이었다. 리히너가 자신이운영하던 취리히의 병원을 동료에게 넘기고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으로 건너간 게 1991년 그해였다.
캄보디아 병원 재건은 평화협정이 진행 중이던 1991년, 프랑스파리의 한 모임에서 시아누크가 리히너에게 즉흥적으로 건넨 제안이었다고 한다. 칸타보파 병원은 시아누크가 1952년 숨진 네 살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국립 아동병원이었고, 리히너는 신참의사였던 1974~75년 스위스 적십자 의료봉사단의 일원으로 거기서 일한 인연이 있었다. 크메르루주 집권으로 중도에 되돌아온 게안타까웠던 그는 즉석에서 시아누크의 제안을 수락했지만, 출국하는 날까지 스스로도 불안했다고 훗날에야 인터뷰에서 말했다.
국왕은 실권 없는 상징적 존재였고, 신생 내각은 가난했다. 병원은거의 폐허 상태였다. 의료진도 장비도 새로 구해야 했고, 건물도수리해야 했다. 그 난관을 그는 돈키호테 같은 낭만적 기질과 용기로, 그리고 스위스 시민들의 후원으로 돌파해나갔다. - P101

그는 1991년으로 되돌아간다면 국왕의 제안을 거절할지 모른다고, 취리히 호반의 안락한 집에 살면서 성공한 의사로 가끔 첼로콘서트나 열며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슈투더는 "한번 생각해봐라. 그는 하루 평균12만 스위스프랑을 모금해야 했다"고 말했다. 리히너는 "입원한아이들을 안고 사진 찍는 걸 싫어한다.(....) 그건 저속하고 kitsch,
무례한 짓이다. 그들을 돕는다는 발상 자체가 무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모금을 위해 그런 사진들을 찍어야 했다. 기억을 잃어가는 퇴행성 뇌질환을 얻은 그는 2017년 3월 스위스로 귀국해 치료를 받았다.
그의 별세 소식에 병원 전 직원은 묵념으로 애도했고, 삶은 계 - P106

란 두 개와 커피 한 잔을 놓은 빈소를 마련했다. 일주일의 애도기간을 선포했던 캄보디아 정부는 조문객이 쇄도하자 기간을100일로 늘렸다. 슈투더는 "그가 바란 건 아픈 아이들을 돌보는일뿐이었다"고, "(나는 슬프지만 그에게 죽음은 어쩌면 구원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캄보디아는 내가 살 곳이 아니고, 결코 그걸 바란 적도 없다.
재정문제만 해결되면 홀가분하게 스위스로 돌아갈 것"이라던 그였지만 죽어서는 캄보디아에 묻히길 원했다. 슈투더는 "병원 한편에 리히너가 즐겨 머물곤 하던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있다"고말했다. 이제 그의 공연은 볼 수 없지만, 그의 나무를 보러 가는이들은 있을 것이다. - P107

프레더릭 D. 톰슨
흑인 여성에게 육상의 길 열어준 코치


미국 연방의회는 1972년 6월 교육법을 개정Title IX, 타이틀 나인, 초·중등 공립학교 커리큘럼과 특별활동에서의 성차별을 금지했다. 지역과 여건에 따라 다르긴 했겠지만, 그전까지 학교 운동장과 체육관은 주로 남학생 차지였고, 운동부도 대부분 남자들만받았다. 여학생 커리큘럼에는 체육 수업이 아예 없는 곳도 많았다. 한마디로 스포츠는 남성의 영역이었다. 참가 신청서에 성별란이 아예 없던 1967년 보스턴마라톤에 ‘K. U. 스위처‘라는 중성적인 이름으로 참여한 최초의 여성 캐서린 스위처 Katherine Switzer보다. 뒤늦게 여성인 걸 알아채고 그의 달리기를 저지하려 한 대회운영위원들과 남성 참가자들이 더 ‘상식적인‘ 이들이었다.
그러니 뉴욕 브루클린의 변호사 프레더릭 D. 톰슨Frederick D.Thompson이 1959년 흑인 여성 육상 클럽 ‘아톰 트랙 클럽Atom TrackClub, 이하 아톰클럽‘을 만든 건, 조금 과장하자면 자메이카에서 봅슬레이 팀을 만드는 것에 견줄 만한 일이었다. 당연히 아무런 지원이 없었다. 시민회관 복도가 그들의 트랙이었고, 몰래 학교 담장 - P109

을 넘나들기도 했다. 멤버는 여덟 살 아이부터 삼십대 주부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십대였다. 가입과 강습은 당연히 무료. 하지만 청소년의 경우 엄격한 가입 요건이 있었다. 성실히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것. 당시 뉴욕, 특히 브루클린의 가난한 십대 흑인청소년들에겐 학교보다, 달리기보다 훨씬 유혹적인 것들(술, 마약, 섹스, 폭력)이 널려 있었다.
그런 어려움들을 딛고 톰슨의 아톰클럽은 1960~70년대 다수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전미육상대회 스타 선수들을 배출하며독보적인 흑인 여성 육상 명문 클럽으로 이름을 날렸다. 설립자이자 유일한 코치 겸 후원자인 톰슨은 스포츠 아마추어리즘의시대가 저문 2000년대까지, 다시 말해 트랙에 서 있을 힘이 다빠질 때까지 클럽을 지켰다.  - P110

개정 교육법 ‘타이틀 나인‘의 영향으로 여학생 운동부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1973년, 그는 생활용품 회사인 콜게이트의 요청으로 미국 최대 여성 아마추어 육상대회인 ‘콜게이트 위민스 게임Colgate Women‘s Game‘을 창설했다. 그는 그해 변호사업을 아예 접고 대회 운영위원장으로 2014년까지일했다.
아톰의 ‘아이들‘은 톰슨을 코치란 호칭 대신 ‘프레디‘라 불렀고, 성인이 된 뒤에도 힘들 때면 찾아와 기대곤 했다. 그들에게톰슨은 ‘스톱워치‘로는 잴 수 없는 귀한 것들을 베푼 멘토이자 친구였다. 프레더릭 D. 톰슨이 2019년 1월 22일 별세했다. 향년85세. - P110

그런 설움과 어려움에도, 마분지를 잘라 잉크로 직접 찍은 ‘ATOM CLUB‘ 티셔츠 유니폼을 아이들은 자랑스러워했다. 클럽 구성원은 그들의 새로운 가족이었고, 점점 나아지는 기록은 열정을 쏟아 도전할 만한 일이었다. 아톰클럽 멤버는 평균 50여 명,
많을 땐 근 200명에 이르기도 했다. 딸의 연습 장면을 구경하고응원하기 위해 가족들이 찾아오는 예도 점차 늘어났다. 간식거리를 챙겨오는 이들, 어두울 때 쓰라고 플래시를 만들어 선물한 부모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대회에 학교 대표팀이 아닌 아톰클럽 소속으로 출전하는 것이 대회 규정상 쉽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심지어 육상 트랙이 아닌 실내 구기 코트에서, 코너링 연습도 못하는 직선 코스만 주로 달린 아이들이었지만, 20주년이던 1979년 무렵 그들은이미 다섯 차례 전미 실내 육상대회 팀 우승과 옥외 대회 3번 우승, 10여 개의 개인 금메달을 획득한 명문 팀이 돼 있었다. 텍사스대와 애리조나대 등이 톰슨에게 꽤 탐나는 연봉을 제시하며육상 팀 코치를 맡아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제 돈을써야 하는 아톰클럽 코치로 남았다. - P113

아누차 브라운 샌더스 Anucha Browne Sanders는 아톰클럽을 거쳐 노스웨스턴대 농구팀에서 활약하며 두 차례 ‘올해의 선수‘에 뽑힌 이력의 스타였다. 그는 여자프로농구WNBA 출범 전인 1985년대학을 졸업(커뮤니케이션 전공), 플로리다주립대에서 마케팅-커뮤니케이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IBM의 스포츠 마케팅 프로그램 매니저와 올림픽 국가대표팀 홍보팀으로 일했다. 그는 NBA뉴욕 닉스의 마케팅 이사와 팀 수석부회장을 지내다 2006년갑자기 해고당했다. 그 직후 샌더스는 자신의 상관인 총괄매니저의 성희롱 사실을 폭로하며 그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상관의 성적 요구를 거부한 데 대한 보복성 해고라고 그는 주장했고, 회사 측은 샌더스의 미흡한 업무 성과가 해고 사유이며성희롱은 없었다고 맞섰다.
샌더스의 곁에 73세의 전직 변호사이자 전 코치이자 오랜 친구인 톰슨이 있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소송 제기 후샌더스와 그의 가족이 겪은 직간접적 협박과 위협들을 폭로하며가해자 측의 비열한 행위를 고발했다. 그리고 "아톰클럽의 모든어린 선수들에게 샌더스는 모범적인 롤 모델 중 한 명이다. 그의 - P116

꿈이 지금 무참히 부서졌다. 농구는 그의 사랑이고 삶이었다. 지금 나는 무척 화가 나 있다"고 말했다. 2007년 10월 법원은 상사의 성희롱 사실과 사측의 은폐 혐의를 인정, 회사가 징벌적 손해배상금 1160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양측은 그해 12월1150만 달러에 합의했다.
톰슨은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 셰릴 투생은 1999년부터 콜게이트 대회 부위원장을 맡아 노쇠한 스승을 도왔고, 로나 포드는이웃에 살며 그를 아버지처럼 간병했다. 그가 사망한 뒤 열린 제45회 콜게이트 대회 결승은 상복 차림의 투생이 위원장을 맡아치렀다. 그리고 닷새 뒤 브루클린의 한 교회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제자들은 단체 추도사에서 "우리는 톰슨처럼 놀랍고 비범한이를 만나 함께 지내는 커다란 행운을 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미소 지을 수 있는 것도 모두 그의 덕입니다"라고 했다. - P117

제임스 르 메주리어
시리아 내전 인명구조대 ‘화이트 헬멧‘ 창설한 영웅


시리아 내전 인명구조대의 공식 명칭은 ‘시리아 민방위대 SyriaCivil Defensc‘지만 ‘화이트 헬멧White Helmets‘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2017년 만해대상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국내에도 꽤 알려졌지만, 그보다 더 전인 2014년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생후 10일된 아이를 구조한 뒤 흐느껴 우는 영상으로 세계인을 감동시킨바 있다. 그 장면이 포함된 2016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화이트헬멧: 시리아 민방위대>는 이듬해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고, 2017년 개봉한 영화 <알레포의 마지막 사람들>은그해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탔다. - P119

메주리어는 시민들이 최소한의 훈련과 장비만 갖춰도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생명을 구조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전역 후만 17년 동안 유엔과 여러 국제단체 및 민간 보안 회사에서 일해온 그는 매년 수백 수천만 달러씩 퍼붓는 중동 평화·안보 프로젝트들보다 시민들에게 헬멧과 로프를 들려주는 게 더 값지고 절박한 일이라 판단했다. 그는 영국과 미국, 일본 정부기관과 중동지원기금 운영자들을 설득해 후원금 30만 달러를 모았다. 그리고터키의 비영리 구난 단체인 ‘수색구조협회AKUT‘의 도움을 얻어7일짜리 초단기 인명구조 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2013년 초시리아 제2의 도시 알레포에서 자원한 시민 스무 명이 처음 그프로그램을 이수했다. - P120

내전이 격화하면서 지원자도 점차 늘어났다. 훈련 프로그램도1개월로 확장되고 세분화해, 형식적인 팔다리 부목법은 골반 대퇴골 부목법으로, 단순 지혈은 팔다리 절단 지혈로 전문화했다.
화재 진압 장비와 기술, 생존자 유무와 위치를 보다 정교하게 파악하는 청음 장비 조작 기술도 프로그램에 포함됐다. 시리아 북부 이들리브에서 최남단 다라까지, 반군이 있고 전투와 폭격이벌어지는 곳이면 어디에나 그들이 있었다. 전국 100여 곳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그들이 2014년 10월, 단일 네트워크의 ‘시리아 민방위대‘로 정식 출범했다. 누구는 시리아인들의 희망이라고 하고 누구는 휴머니즘의 마지막 보루라고도 부른, 총 인원 3천200여 명의 화이트 헬멧이 그렇게 탄생했다. - P120

그가 숨진 채 발견되기 불과 사흘 전 러시아 외무장관은자기 트윗에 그를 ‘테러조직과 연계된 전직 MI6 (해외 파트 요원‘
이라고 비난했다.
저 모든 정황들이 그를 맥 빠지게 했을 것이다. 그의 아내는그가 우울증 치료제와 수면제를 복용했다고 터키 경찰에 진술했다. 하지만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아마도 시리아 내전의 전황자체였을 것이다.
시리아 정부와 야권, 그리고 이른바 시리아 시민사회 대표단은지난 10월 말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내전 종식을 위한 새로운 헌법 제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한 유엔 시리아특사는 "역사적 순간"이라며 "내전 고통을 끝내기 위한 실질적방안을 마련해달라"고 당부했다. - P128

러시아 전폭기를 앞세운 시리아정부군이 반군의 마지막 거점인 북부 이들리브 주 탈환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보름 전인 10월 15일 ‘국경없는의사회‘도 시리아에서 철수했다. 위험지역에 가장 먼저 들어가 가장 마지막까지버티기로 정평이 난 그들조차 "더 이상 국제 직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화이트 헬멧 대원들은 지금도 현지에서 활동 중이다.
근년의 메이데이 레스큐는 소말리아 모가디슈와 레바논 북부베카 계곡의 응급의료 지원 시스템 구축 사업 등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메주리어는 시리아의 저 모든 절망적 상황을 마지막까지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현장을 누빈기후 활동가들이 악화하는 기후 상황을 속절없이 지켜보며 늪처럼 빠져든다는 ‘기후 우울증climate Grief‘, 비영리 및 공익 활동가들이 흔히 겪는다는 번아웃 모두 메주리어의 사정이기도 했을것이다. - P128

룰라 콰워스
요르단의 한 세대를 가르친 페미니스트


1984년 요르단대학 영문과 대학원생 룰라 콰워스Rula Quawas에게 지도교수가 추천한 논문 주제는 T.S. 엘리엇과 타예브 살리Tayeb Salih, 영국에서 활동한 수단 출신 이슬람 작가의 작품 분석이었다. 콰워스는 그 무난한 선택이 못마땅했다고 한다. 그는 19세기 미국 페미니스트 작가 케이트 쇼팽Kate Chopin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케이트 쇼팽은 이슬람권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친서구적인 요르단에서조차 생경한 작가였다. - P131

콰워스는 케이트 쇼팽의 대표작 『각성』에 매료돼 있었다. 1899년 작품 『각성』은, 애정 없이 결혼해 두 아이를 둔 미국 남부의 한 상류층 여인(에드나)이 여름 휴양지에서 육체적·정신적 사랑에 눈뜬 뒤, 시대와 계층의 인습과 아내이자 어머니에게 부과된 사회적 금기, 윤리적 책임을 벗어던지고 여성으로서의 주체적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로선 적나라한" 육체적·심리적 성애 묘사로 "천박하고 혐오스럽다"는 평가와 불륜을 미화한 "유해한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작가는 지인들로 - P131

부터 외면당하고 책은 공공도서관에서조차 거부당하게 만든 문제작이었다.
콰워스가 논문을 쓰려던 무렵 요르단의 젠더의식은 케이트 쇼팽이 살던 19세기 말 미국 남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콰워스는 논문을 포기하고 미국에 유학 중이던 남동생에게 건너가 석 달 남짓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여성 작가 이디스 워튼Edith Whatton과 윌라 캐더willa Cather, 아그네스스메들리Agnes Smelley 등을 알게 됐다. 콰워스에겐 그들의 작품뿐아니라 젠더에 갇히길 거부했던 그들의 삶, 예컨대 워튼의 여행편력과 당당한 이혼, 스메들리의 저널리스트 활동 등이 부러웠을것이다. - P132

귀국 후 그는 용기를 내 교수에게 미국 여성주의 작가 넷에 대한 논문을 쓰겠다고 했고, 대강의 작품 내용을 설명했다. "교수님의 첫 반응은 ‘섹스에 대해 쓰겠다는 거냐?‘는 거였어요." 논문을 지도해줄 만한 페미니스트는커녕 여성 교수도 전무하던 때였다. 논문 심사 통과 과정이 험난할 것이라며 교수는 만류했지만,
그는 각오가 돼 있노라 말했다고 한다.
어쨌건 그의 논문)는 교내에 모스크를 둔 그 대학의 완고한남자 교수들을 설득해냈고, 1991년 요르단에선 처음으로 페미니즘 문학 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땄다. 1995년 미국 노스텍사스대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 모교 영문과 교수가 된 그는 비록대학원 선택과목이긴 했지만 요르단 최초의 페미니즘 강좌를 개설했고, 대학 내 여성학연구센터와 요르단 국가여성위원회 지식생산분과를 만들었다. - P132

하지만 그가 만들고 이끈 건 강좌와 연구센터가 아니라 요르단의 새로운 한 세대였다. 룰라 콰워스가 2017년 7월 25일 별세했다. 향년 57세. - P133

여성학연구센터를 설립할 수 있었던 데는 현 국왕(압둘라 2세)의고모인 바스마 빈트 탈랄Basma Bint Talal 공주의 후원 덕이 컸다고한다. 2009년 콰워스는 여성 지위 및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탈랄 공주가 주는 리더십 · 헌신 공로훈장을 탔고, 2013년 미국국무부의 ‘국제 용기의 여성상IWCA, International Women of CourageAward‘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17년 8월 1일, 요르단 의회는 강간범이 피해자와 결혼하면기소하지 않도록 규정한 형법 308조, 이른바 ‘강간범 결혼 면책법Marry-Your Rapist Law‘을 폐지했다. 성폭력 피해를 가문의 수치로여겨 여동생이나 딸을 ‘명예살인‘하기도 하는 아랍 몇몇 나라와가톨릭 국가인 필리핀 등이 지금도 저 법을 유지하고 있다. 앞서모로코가 강간을 당한 뒤 강제 결혼을 앞두고 있던 16세 소녀 아미나 필랄리Amina Filali의 자살 2년 뒤인 2014년 저 법을 폐지했다. - P137

이미 ㄹㄹ니ㅠㅠㅠㅠ
"여성은 고깃덩이가 아니라 영혼을 지닌 주체로 인식돼야 한다.
반드시 그리되리라 나는 믿는다. 내 생애에 이뤄지지 않더라도언젠가는・・・・・・"이라고 말하던 콰워스는 저 기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는 대동맥 파열로 수술을 받았지만, 사인은 생체검사 합병증이었다.
콰워스는 이십대 무렵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적 없다고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걸 믿기 때문에, 내 소명임을 알고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고 누구도 내게 다른 길을가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좋은 교육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교육이란 스스로 뭔가를 해낼 수 있는 힘과 기술, 비판적이고 창조적이며 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 - P137

그리고 맞서 도전하며 ‘내 생각은 다르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지인과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뿐 아니라 그의 열정과 애정을 더불어 추모했다.
이십대 초반의 콰워스는 소설 『각성』을 읽으며 부러움과 막막함과 자괴감으로 흐느꼈다고 말했다. 소설은 주인공 에드가 영혼의 해방을 맞이했던 루이지애나 그랜드아일Grand Isle 의 해변에 다시가 알몸으로 헤엄쳐 나아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헤엄을치며 앞으로 나아가던 그날 밤이 떠올랐고, 해변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공포심에 사로잡혔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에드나는 지금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어린소녀시절 시작도 끝도 없는 것 같은 푸른 초원을 가로지르던 그때가 생각났다. 팔과 다리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

에드나처럼, 콰워스도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갔다. 그는 숨이멎을 때까지 힘을 잃지 않았다. - P138

버지니아 R. 몰런코트
퀴어 신학의 선구적 전사


원죄를 품고 태어나 동성을 사랑하는 이중의 죄를 짓고,
제 안에 든 악마의 영을 저주하며 감정도 판단도 불신하고, 심지어 교사에게 두꺼운 성경책으로 얻어맞고 그만 살자고 물에 뛰어든 적도 있는 여성이, 문학에서 위안을 얻으며 공부해 교수가 되고, 성경을 다시 읽음으로써 신에 대한 오해를 풀고 자신을 긍정하게 됐다. 그 경험과 배움을 그는 ‘잃어버린 신을 되찾아야 한다‘는 요지의 책으로, 그것도 여러 권이나 "독창적이고도 설득력있게" 썼고, 보수 교단과 열성 신자들의 위협과 조롱, 저주를 측은히 여기게 됐다. 그는 십여 권의 책과 숱한 강연을 통해 자신이 찾은 진짜 예수를 차별 없는 사랑과 다름에 대한 격려로 북돋는 신앙을 열성적으로 ‘전도‘했다.
"할렐루야, 아이 엠 퀴어 Hallelujah, I‘m Queer!" 퀴어 신학의 선구적 전사 버지니아 R. 몰런코트virginia R. Mollenkott가 2020년 9월25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 P141

몰런코트는 "부디 하나님she 그 자신과 우리에 대해, 여성 일반에 대해 하신 말씀을 떠올려보시라. 우리 모두가 신성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우리는 신성하지 않다는 말씀이냐?"라고 답장을 썼다.
몰런코트는 목숨의 위협까지 감당해가며 행한 자신의 분투를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그의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며 죄의식을 벗고 위안과 힘을 얻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성소수자 중심 교파인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교회 목사 겸 작가로 활동해온 키트리지 체리 Kittredge Cherry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몰런코트의 1978년 책을 읽고 힘을얻어살아남은 LGBTQ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상상도 할수 없을 것"이라고, 그가 "할렐루야, 아이 엠 퀴어"라고 우람차게외친 1987년 강연 테이프를 지금도 찾아 듣곤 한다고 썼다. - P146

미국 연합감리교회 목사이자 트랜스젠더인 데이비드 위클리David Weekley와의 인터뷰에서 몰런코트는 트랜스젠더들에 대한폭력 등 혐오 범죄의 대처법에 대해 "건강한 자의식과 같고 다른이들끼리의 연대 외에는 궁극적 해법이 없다"며 상상을 통해 타인의 감정에 다가설 수 있는 능력, 즉 ‘공감적 상상력 sympatheticimagination‘이 도덕의 바탕이라고 말했다. 같고 다른 이들의 상호존중과 믿음, 힘의 북돋움cmpowering이 페미니즘의 핵심이라 했던것, 차별 없는 사랑과 연민이 성경과 신의 참모습이라 했던 것이 그렇게, 윤리학-철학-문학이 구현하고자 했던 공감적 상상력과 포개졌다. 나는 윤리야말로 궁극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신은 전능하고, 전능해야 신이다. 스스로는 보편구제설을 믿 - P146

는 복음주의자라 했지만, 몰런코트는 이미 신앙의 망토를 두른인본주의자였다.
2018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을 "마음으로 남성이기도 하고여성이기도 한 바이젠더 bigender"라 했고, 『편재하는 젠더』에서는
"남성적 여성, 트랜스섹슈얼은 아닌 트랜스젠더"라고도 자신을소개했다. 그는 재무설계사인 데브라 모리슨과 16년간 파트너로지냈고, 1997년 연인으로 만난 고교 교사 주디스 수재너 틸턴과2013년 결혼해 사별할 때까지 해로했다. 그는 2020년 6월 낙상사고 후 치료를 받았고, 대통령선거 우편투표와 집에서 임종하고 싶다는 두 가지 마지막 소원까지 이룬 뒤, 아들 부부와 전파트너 모리슨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히 눈을 감았다. - P147

레이 힐
이데올로기를 가로지른 한 노동자


영국인 노동자 레이 힐Ray Hill의 삶은 크게 5단계로 나뉜다.

-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를 중퇴하고 거리의 거친 싸움꾼으로 성장한 청소년기
- 군 제대와 결혼 후 버스 차장 등 온갖 노동으로 돈을 벌어가족을 부양하고자 분투한 시기
- 극우 이념에 사로잡혀 네오나치 단체 활동가로 살았던 삼사십대 20년 세월
- 공개적으로는 극우파 리더로 살면서 은밀히 조직의 비밀을언론에 폭로해 여러 조직을 내파시킨 ‘변절전향‘의 5년
- 자신의 부끄러운 진실과 극우의 추한 얼굴을 폭로하고, 극우이념에 취약한 청년들의 현실을 고발하는 데 바친 여생

힐의 드라마 같은 삶에서 특히 주목되는 건, 그가 글과 말로 먹고산 ‘이데올로그‘가 아니라, 극우 활동가로 사는 동안에도 늘 - P149

몸으로 가정을 부양한 노동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옳다고 여긴바, 저 광역의 이념 지대를가로질렀다. 말년의 그는 "칠면조에게 크리스마스에 표를 주라ask turkeys to vote for Christmas‘고 설득하는 것으로는 결코 정치적 극단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공적인 해악을 알면서도 극단주의에 선동당하는 이들에게 극단주의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는 의미,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바에 동조하라는 요구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였다. 대신 그는 이렇게 주문했다.
"(한때의 나처럼 가난한 백인 청년 노동자계급이 극우의 유혹에빠지지 않게 하려면, 그들에게 영감의 리더십과 진정한 열망, 무엇보다 희망을 위한 기회의 평등을 약속하는 주류 정치의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 P150

그는 3년간의 군복무 후 자신의 딸을 임신한 웨이트리스 글레니스 샵코트Glennis Shapcott와 1966년 결혼해 레스터의 가난한 동네에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혼자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게 당시 그에겐 무척 버거웠다고 한다. 그는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무능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런 그에게 솔깃하고강렬한 유혹이 찾아왔다. ‘모든 게 이민자 탓‘이라는 극우의 꼬드김이었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 "당신의 불행이 모두 다른 누군가의 탓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무능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제 내 마음 속에서, 인종 편견은 가장으로서의 위신을세우는 동력이 된다. 가난과 고통은 더 이상 내가 못난 탓이 아니다. 모든 원인은 이민자들에게 있고, 이민자와 싸우는 것이야 - P152

말로 내 가정을 지키는 것이 된다"고 썼다.
그는 신념의 활동가이자 열정적 웅변가였다. 1968년 더 규모가큰 극우단체 국민보존협회RPS, Racial Preservation Society로 옮겨 당시영국 네오나치의 거물 콜린 조던Colin Jordan을 만났다. 힐은 조던이 1968년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은 전국 규모의 극우단체 ‘브리티시무브먼트BM‘의 레스터시 지부장이 됐다. 조던이 이듬해 버밍엄 하원 보궐선거에 출마(낙선)했을 땐, 보디가드 겸 핵심 참모로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아내 글레니스는 점점 변해가는 남편을 못마땅해하면서도 대체로 참아줬다고 한다. - P153

공에 정착해 사는 동안 그의 가족도 유대인 등 여러 ‘2등‘ 이웃들의 도움을 받았고, 인종차별과 비백인의 비참을, 그들의 인권·저항운동을 보고 겪은 터였다. "창자가 꼬이는 느낌이었다. 그 일가족이 당한 일이 나 때문이라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세상 어디에도 갈 곳 없이 거리에 내몰린 그 불쌍한 가족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바로 내가 그들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는 자각 때문에 그 단순한 인간적 동정조차 할 수 없었다.(……) 한없이 부끄러웠다. (…) 인종주의자로서의 나의 삶이 그렇게 끝이 났다." 몇달간 번민하던 끝에 그는 1979년, 아내와 셋으로 불어난 아이들과 함께 10년 만에 레스터로 귀향했다. 2015년 인터뷰에서 그는
"인간적인 마음을 조금이라도 지닌 사람이라면 남아공에서10년을 머물며 아파르트헤이트를 혐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너무 끔찍했다. 끔찍함 그자체였다"라고도 말했다. - P154

힐의 제보 덕에 1981년 이탈리아 볼로냐, 프랑스 파리, 독일 뮌헨 등지에서 잇달았던 극우 폭탄테러의 배후, 즉 유럽 네오나치 네트워크가 드러났고, 여러 건의 무기 밀거래 현장이 적발됐으며,
1981년 런던 노팅힐 페스티벌 폭탄테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극우파 테러리스트들의 영국 내 비호 및 은신 네트워크를 적발한 것도 그의 제보 덕이었다. 극우파 리더로서 음지에서 저 활약을 펼치는 동안에도 그는 노동자였다. 택시 기사였고,
도박장 매니저였으며, 아내를 도와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했다.
1984년 BBC 채널4 다큐멘터리 〈테러의 이면The Other Face ofTerror〉에 그가 비로소 실명과 얼굴까지 공개하며 출연해 자신의진실, 즉 극우파로 산 20년과 내부 첩자로 산 지난 5년의 진실을고백하고 극우파의 이면을 폭로했다. <가디언>은 당시의 충격을두고 "(영국 극우파가) 할 말을 잃고 분노로 졸도할 지경이 됐다" 고 썼다.
보복 살해 등 힐에 대한 극우파의 위협이 이어졌다. 소이폭탄 - P156

테러로 집이 전소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년까지 학교 강연과 집회 등을 통해 인종주의 극우집단의 해악과 비열함을, 불의와 부도덕을 폭로하는 데 헌신했다. <서치라이트>는 "그 누구도(적어도 실명을 공개할 수 있는 이들 중에서는) 영국 극우 운동에 레이 힐보다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사람은 없었고, 반파시스트 세대에 영감을 제공한 사람도 없었다"고 썼다.
그는 극우 운동에 포섭된 가난한 백인 청년 노동자 계층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한사코 삼갔다. 극우의 유혹에 그들의 처지)이 얼마나 취약한지, 유혹의 방식과 논리가 얼마나 교묘하고 능란한지, 그래서 얼마나 저항하기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극우를 자라나게 하는 궁극적인 토양, 다시 말해 책임이 정치의 실패, 정치의 부재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 P157

사디 야세프
독립 영웅과 테러리스트 사이


이라크전쟁 개전 직후인 2003년 9월 미국 국방부는 파병 장교와 백악관 안보보좌관실 관계자 등 40여 명을 모아놓고 영화 한편을 단체 관람했다. 또 이례적으로 그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초대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프랑스는 어떻게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이념 전쟁에서 패배했는가. (…) 이 영화는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드문 작품이다." 이들이 본 영화는이탈리아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Gillo Pontecorvo의 1965년 영화 <알제리 전투>였다.
영화는 130년 프랑스 식민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제리인들이 벌인 독립전쟁(1954~1962) 중 1956, 1957년 수도 알제에 집중된 테러와 보복 테러, 체포, 고문과 살인, 진압의 양상을 다뤘다. 네오리얼리즘 거장 폰테코르보는 뉴스 화면을 편집한 것 같은 흑백 다큐 기법으로 저 영화를 촬영했고, 출연진도 한 명을뺀 전원을 일반 시민과 여행자로 채웠다. - P159

영화 〈알제리 전투〉는 이탈리아 공산당원이던 좌파 감독 폰테코르보가, 테러 주체인 알제리 민족해방전선NLF, National LiberationFront 전투 사령관의 회고록을 토대로 만든 시나리오로, 독립 직후 알제리 자본으로 만들어졌다. 폰테코르보는, 군인들의 고문장면뿐 아니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냉혹한 테러 양상, 예컨대유럽 민간인 여성, 아이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희생시킨 폭탄테러장면까지 여과 없이 담았고, 테러 및 고문의 논리와 심리까지 파헤침으로써 값싼 선전영화의 함정을 벗어나 폭력과 해방, 야만과휴머니즘이라는 본질의 틈새로 돌진했다. 영화는 1966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당국은 고문 사실 자체를 부정하며 영화의 국내 상영을 5년간 금지했다. - P160

사디 야세프 Saadi Yacef는 도심 테러의 지휘자인 알제자치지구민족해방전선 게릴라 사령관이었고, 영화 시나리오의 원작인 『알제전투 회고록souvenirs de la bataille d‘Alger』을 쓴 작가였으며, 감독을섭외하고 제작비를 댄 영화 제작자였고, 직접 출연까지 해서 자신(엘 아디 자파르 역)을 연기한 배우였다. 다시 말해 그는 해방전쟁의 분수령이 된 1956~57년 알제 테러의 주역이자 영화의 숨은 주연이었다.
폰테코르보의 성취에 가려져 있던 사디 야세프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원작 필름이 고화질 영상으로 복원된 2004년 무렵이었다. 그는 후세대가 자신들의 삶과 활동을 있는 그대로 기억해주길 바랐다고. 다만 자신들의 테러에 대해선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한 ‘알제리내전‘ 테러에 대해서는 "민족해방전선의 테러와 방식만 닮았을뿐 동기도 지향도 전혀 다르다"고, "그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주장했다.
20세기 무슬림 테러 역사에 논쟁적인 첫 장을 연 ‘이슬람 전사‘ 출신의 작가 겸 영화인 사디 야세프가 2021년 9월 10일 별세했다. 향년 93세.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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